[사설]룰라의 승리, 오바마의 패배, 2012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5일 03시 00분


민주국가의 유권자들은 정치와 정치인이 ‘희망’을 보여줘야 표를 준다. 브라질 사람들은 지난달 31일 대통령 선거에서 지우마 호세프 후보를 뽑았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지명한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2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의 분위기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노-바마!’였다. 그는 2년 전 ‘변화’를 내걸고 당선돼 미국 역사를 새로 썼지만 미국 국민에게 좋은 일자리도,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도 주지 못했다.

2007년 말 우리 국민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경제 대통령’에 대한 희망으로 이명박 후보에게 압도적 승리를 안겨줬다. ‘실현 가능성 없는 구호’라고 공격받았던 ‘747(7% 경제성장, 1인당 국내총생산 4만 달러, 7대 경제대국) 공약’에도 국민은 기대를 걸었다. 2012년 치르게 될 총선과 대통령선거에서도 젊은 세대를 포함한 많은 유권자가 ‘나와 내 가족의 일자리, 내 재산과 우리 가계(家計)의 현실과 장래’를 따져보며 표심을 정할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를 물려받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수천억 달러의 경기부양책과 구제금융 지원 같은 재정정책을 폈지만 국민이 가장 절실하게 원한 일자리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개혁 어젠다에 매달려 국민에게 “경제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원성을 샀다. 미국 경제계는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건강보험개혁과 금융개혁 법안이 규제를 양산하고 불확실성을 키워 투자의욕을 꺾는다며 “대통령의 개혁정책이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美민주당, 경제·일자리·희망 못줘 무너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재정만 투입하면 공공 일자리가 늘어날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만일 그 돈이 민간에서 활발하게 돌도록 하고, 그 효과로 소비가 확대돼 기업이 투자와 생산을 늘렸다면 지금쯤 미국 국민은 오바마 정권에 계속 희망을 걸었을지 모른다.

돈이란 대통령이 호통을 친다고 대통령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고분고분 흘러가지 않는다. 돈은 투자 매력이 있는 곳을 택하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일자리와 소비가 더 늘어난다. 정치란 좋은 정책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반대파와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까지 포함한다. 기업과 시장이 이런 선순환 궤도에 오르도록 정치를 해야 성공한 정권,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부가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정권 재창출일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해 이명박 후보에게 참패했다.

미국만큼 큰 땅과 자원을 가졌으면서도 그만한 부를 누리지 못하는 브라질에 룰라 대통령은 처음으로 자부심을 안겨준 지도자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도 “룰라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이고, 브라질이 진짜 내 나라라는 진정한 느낌을 갖게 해준 대통령”이라고 칭송할 정도다.

2003년 취임해 연임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경제성장과 함께 빈부 격차를 줄였다는 점이다. 부자와 기업을 옥죄고 서민계층엔 ‘퍼주기’식 복지나 분배정책으로 이룩한 게 아니라 성장을 통해 경제규모 세계 8위로 키웠다. 세계화를 받아들여 경제자율화와 민영화 외자유치에 힘쓰면서, 정부 지출을 줄이고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막는 정통 시장경제 해법을 썼다. 차기 월드컵(2014년)과 올림픽(2016년)까지 유치한 브라질은 지금 축제의 나라 같다.

정부와 정치권, 브라질에서 뭘 배울 건가

브라질의 대표적 빈곤탈출 프로그램 ‘볼사 파밀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종잣돈을 준다. 그 덕분에 2003∼2008년 빈곤층은 43% 줄었고 3200만 명이 중산층으로 올라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가난한 사람의 수입이 큰 폭으로 늘게 해 브라질을 기회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요즘 국내 정치권은 ‘복지 최우선’ 경쟁에 몰두하는 듯하다. 그러나 서민을 영원히 서민으로 가두어 놓는 소모적 시혜로서의 복지는 결국 반(反)서민적인 정책이 되고 말 것이다. 여·야당 가운데 과연 어느 정당이 서민을 더 많이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정책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허구(虛構)의 복지로 국민을 오래 속이기는 어렵다.

10년 후에는 인구가 줄기 시작한다. 그 안에 우리가 이룩해야 할 선진국을 상상해 보면 가야 할 길이 나온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보상을 받는 나라가 공정한 사회다.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받쳐줄 사회안전망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이의 인생을 책임져 주는 나라는 복지 병(病)에 시들 수밖에 없다. 우리 정치인들은 미국과 브라질 선거에서 뭘 배울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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