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성철]입학사정관제와 공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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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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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에서 교육 분야 취재를 제법 오래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자녀 교육문제로 문의나 부탁을 해 오는 경우가 많다. 입시철이 되면 더욱 그렇다. 절박한 심정을 잘 알기에 되도록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얼마 전 지방의 한 친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해 고3인 아들이 서울시내 한 사립대의 수시모집에 지원한다며 도움을 청한 것. 자기소개서 작성 지도를 잘하는 학원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성적을 물어보니 학급에서 중간 이하라고 했다. 그 정도로 합격할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입학사정관제잖아.”

최근 서울 모 대학에서 입학처장을 맡고 있는 교수 한 분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올해 입시 후유증이 유난하다며 수시모집에서 떨어진 한 수험생의 항의 편지 내용을 전했다.

이 대학 인기학과 입학사정관 전형에 지원했던 이 수험생의 내신은 7등급. 고교 내신은 최하가 9등급이다. 이 학생은 편지에서 탈락 이유를 물으며 4개월 동안 자기소개서에 공들인 시간이 아깝다고 썼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했더라면…. 입학처장은 편지 말미에 이런 말도 있더라며 웃었다. “이게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사회입니까?”

내신 5등급으로 이 대학 의예과에 지원했던 수험생도 항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수백 시간의 봉사활동 실적으로 성적 열세를 만회하고 합격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었다.

이 학생의 항의 내용은 “봉사활동은 의사가 되기 위한 자세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냐”라는 것. 물론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의학 공부를 해낼 수 있는 학업능력이라는 것은 몰랐을까.

입학사정관제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학생의 성적뿐만 아니라 창의력, 잠재력, 소질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선발하자는 취지다. 학업능력이 ‘약간’ 뒤져도 잠재력이 있는 학생에게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합격의 조건은 ‘학업능력+창의력, 잠재력’이다. 이 가운데 기본인 학업능력은 생략되고 창의력, 잠재력만 부각된 것이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 입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학업능력이 부족한 학생이 입학했다가 중도 탈락하면 대학과 학생 모두에게 불행이다. 실제로 고교에서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학생들이 공과대학에 진학했다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고생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오해가 생긴 데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입학사정관제 합격생 가운데 극히 이례적인 사례만 보도해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었다. 일부 신문은 입학사정관제 합격자 내신 평균 점수가 높아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 대학이 일부러 내신 점수 낮은 학생을 뽑아야 취지에 맞는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예산 지원을 미끼로 입학사정관제 확대에 급급할 뿐 정책 홍보를 제대로 못한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크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13일 학부모들과 만나 “(입학사정관제 정착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안착 단계로 가고 있고 매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관 말대로 모든 정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대책은 있어야 한다. 대학입시는 수험생 개개인의 인생이 걸린 문제다. 입시정책은 실패할 경우 피해 당사자들이 만회할 기회가 거의 없다.

홍성철 동아이지에듀 대표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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