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인철]학부모인권은 없나

동아일보 입력 2010-09-20 03:00수정 2010-09-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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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에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개전의 기회를 부여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추후 학교 규정을 위반할 경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습니다.’ 어느 정치범의 전향서를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지만 실제로 어느 학교의 서약서 내용이다. 학부모 A 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조금 잘못했다고 학부모 사인을 받아오라며 보낸 서약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소개했다.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A 씨는 “훈육 차원에서 반성문 정도는 써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개전(改悛)’ ‘어떠한 처벌’ 같은 권위주의적인 표현을 보니까 순간적으로 내가 더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 1학기부터는 A 씨가 그런 일로 흥분할 일도 없을 것 같다. 경기도교육청은 체벌 금지, 반성문 서약서 금지 등을 담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안을 17일 도의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통과시켰다. 소지품·일기장·수첩 검사, 휴대전화 소지 자체 금지, 야간자율학습·보충수업, 종교행사 등을 강제할 수 없다. 학생이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생각할 경우 학생인권옹호관에게 상담과 조사를 요구할 수 있고 위반 교사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체벌 대신 상벌상담제, 봉사활동, 학부모 면담 등이 검토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도 체벌 금지는 이번 학기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학생인권조례도 내년 1학기부터 시행한다.

이런 ‘화통한’ 정책을 들으면 가슴이 좀 시원해질 법도 한데 학부모들은 되레 가슴이 답답해진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체벌 금지와 관련해 학부모들에게 보낸 가정통신문에서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라는 한 공익광고를 언급했다. 곽 교육감은 “우리 부모님들의 고민과 갈등을 함께 안고 있는 구절”이라며 “그 광고를 보며 저 역시 마음 한 부분에 가시가 박힌 듯 편치 않고, 아버지로서 그리고 교육감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목공(木工)교실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이들이 톱질을 하고 못도 박아보면서 손재주도 키우고, 공부 이외의 재능과 특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백번 옳은 말씀이고,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진보교육감들과 교육과학기술부가 쏟아내는 현실의 정책들을 보는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하소연한다. 빗나가려는 아이들을 학교에서라도 잡아줘야 하지 않느냐, 교사가 지시라도 할라치면 눈을 부릅뜨고 막말도 서슴지 않는 사춘기의 아이들을 마구 풀어놓고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서술형 평가 확대는 교과서 표현대로 쓰지 않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점수를 깎아 아예 교과서를 외워야 할 판이다. 책꽂이 만들기, 바느질하기, 학교신문 만들기, 채집 활동, 예체능평가도 학교에선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내주는 숙제로 모두 엄마 몫이다. 사교육비 잡는다고 도입한 입학사정관제는 더 난감하다. 외부 경시대회, 토익 토플 성적은 안 되고, 사교육 없이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한 실적과 교내 활동만 적어내라니 웬만한 학생은 자기소개서에 쓸 게 없다. 오죽하면 학교생활기록부 진로계획을 고쳐 달라고 교사들을 조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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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엄마들은 이번 추석 연휴 뒤에 시작되는 중간고사에 대비해 오늘도 아이들과 공부 씨름을 해야 한다. 이제 학부모도 좀 쉬고 싶고, 공익광고 같은 ‘부모’도 되고 싶다. 정부와 시도교육청은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속도를 조절하고 부작용과 대안을 충분히 논의한 뒤 시행했으면 한다.

이인철 사회부장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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