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王차관’ 박영준을 실세 총리로

동아일보 입력 2010-09-05 20:00수정 2010-09-06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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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마법에 빠진 것 같다. “이게 공정한 사회냐.” 한마디만 외치면 순식간에 불의가 바로잡힌다. 이대로 기득권의 반칙이 사라진다면 정부 여당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건 물론 선진국 진입도 금방일 듯하다. 한 가지 째깍거리는 미해결 뇌관이 있긴 해도 대통령은 이마저 날려버린 상태다.

“내가 임명한 사람 중 왕씨는 없다. 이른바 실세 차관을 그렇게 부르는가 보던데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신임 장차관 모두 일 잘해서 실세가 돼 달라는 덕담이겠지만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로 의혹을 샀던 박영준 지식경제부 2차관을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하다.

검찰이 중간 수사결과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 총리실 직원 3명을 기소한 지 이틀 뒤, 대통령은 차관급(총리실 국무차장)이던 그를 차관으로 승진시키며 무한 신뢰를 보였다. 이에 따라 의혹사건은 사실상 종료된 것과 다름없게 됐다.

얼마나 일을 잘했기에 대통령이 공개 칭찬을 하는지 궁금해서 나는 지난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봤다. 과연 이 정부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거의 박 차관 손을 거쳤을 정도로 그는 많은 일을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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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내각 인선과 검증부터 초기 청와대 운영과 조직평가를 주관한 대통령실 기획조정비서관이 그였다. 2008년 6월 사표를 낸 것도 인사 파동과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터진 국정 난맥상에 대한 책임 때문이니 총리급 책임을 짊어졌던 셈이다.

이광재 안희정 부러울 것 없다

2009년 1월 국무차장으로 돌아올 때 그의 포부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내각 곳곳에 심는 역할을 하겠다”였다. 4대강도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따라다녀 ‘4대강 살리기’ 정책은 누구보다 잘 안다. 세종시 수정안이 살아있던 올해 초엔 “내가 대선 과정에서 조직을 챙겨서 그 지역 사람을 많이 안다”며 결국 수정안 찬성으로 갈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할 만큼 세종시 수정 문제에도 관여했다.

더 놀라운 건 한승수 전 총리와 이상득 의원 같은 거물급이 하는 자원외교를 맡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1년간 두 달 이상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리카 등지를 누볐다. 정부조직법은 국무총리실의 역할을 ‘각 중앙행정기관 행정의 지휘·감독, 사회위험·갈등의 관리, 심사평가 및 규제개혁에 관해 국무총리를 보좌한다’고 했으나 그는 이를 뛰어넘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대통령은 “왜 여권엔 이광재 안희정 같은 사람이 없느냐”고 한탄했지만 두 사람 못지않은 인물이 바로 곁에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새로 총리를 찾느라 애쓸 게 아니라 박 차관을 총리로 발탁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대통령의 후반기 국정운영 철학을 공유하고 이행할 인물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50세이니 세대교체도 된다. 국회의원 보좌관만 했지 의원은 안 한 덕에 여의도물이 덜 들었으니 정치문화 교체도 가능하다.

중량감이 약하다는 반대가 있겠지만 권력의 무게란 대통령의 신임에 달린 법이다. 더구나 대통령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헌법대로 총리의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을 보장해주면 된다. 솔직히 성과는 나빴어도 인선과 검증은 그의 전문분야다. 드디어 우리도 실권과 직책이 들어맞는 명실상부하고 실용적이며 유능한 총리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야당도 반색할 것이 틀림없다. 소원대로 인사청문회에 앉힐 수 있게 돼서다. 숨죽었던 불법사찰 문제가 불거지겠지만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영포라인 인사개입 의혹이 보도된 7월 초 그는 불법사찰 건을 보름 전에야 인지했다며 “민간인 불법사찰은 잘못됐다. (당사자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대통령이 공직자의 거짓말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핵심 측근이 거짓말 할 리 없다. 청문회를 통해 그의 연루 의혹이 해소되면 본인도 개운하고 정부도 더는 공정사회론에 발목 잡히는 일 없이 국정에 매진할 수 있어 좋다.

공정한 사회, 진실도 드러날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사찰 건이 2012년 총선 아니면 대선 이전에 다시 터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관련자료나 증언자가 나오든지, 이번처럼 그냥 넘어갈 걸로 만만히 보고 슬그머니 불법사찰이 재개될지 모른다. 국민세금을 쓰는 국가기관에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법사찰이 벌어졌는데 지시한 윗선도, 보고받은 몸통도 없다는 것부터가 소가 웃을 일 아닌가.

정권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행정조직이 민간인과 정치인들을 사찰하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독재정권에서 주로 쓰던 이런 표현을 다시 쓴다는 것이, 쓰면서도 눈치 한번 보게 되는 나 자신이 너무나 참담하다. 하물며 지가 알고 하늘이 아는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나라는 공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지금 털고 넘어갈지, 2년 더 시한폭탄을 안고 갈 것인지 결정은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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