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어느 벤처기업 사장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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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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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싹 다 가져갑니다. 감사원 감사나 검찰 수사도 그보다는 덜할 거예요. 기업 비밀이나 법적 근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로 화제가 옮아가자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기업이 제품 원가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협력업체의 특허기술이며 제품설계도, 회계장부 등을 샅샅이 뒤져 가져간다며 흥분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의 설계도를 가져다가 계열사로 넘긴 사례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은 입이라도 벙긋할 수 있으니 세상이 좋아진 편이란다. 거래가 끊길까 두려워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던 중소기업 사장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기업에 하청업체는 파트너는커녕 머슴만도 못한 존재예요. 하청업체 사장이 대기업 임원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죠.”

그는 얼마 전 국내 대기업과의 거래를 청산했다. 지금은 해외 기업에만 납품한다. 해외 대기업은 최고경영자가 직접 협력업체 사장을 만나 파티도 열어주고 같이 사업을 논의한다고 한다.

대기업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대기업이 새로 만들어낸 게 뭐가 있습니까? R&D(연구개발)는 있던 것을 좀 고치고 확대하는 게 R&D가 아니죠. 내로라하는 인재를 몽땅 데려다가 베끼고 바꾸고 마케팅하고 협력업체 납품단가 후려쳐서 이익 내는 것밖에 더했나요? 정말 새로운 거, 세상에 없던 기술은 전부 중소기업에서 만든 겁니다.”

십수 년간 대기업에 당한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경험했거나 들은 일부 현실일 뿐 전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기업은 몇 년 전부터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외쳐왔는데 그 온기가 아래까지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납품단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원가 절감이 필수”라고 말한다. 그건 중소기업인도 인정한다. 문제는 거래관행과 기업문화다.

가령 해외 대기업은 5억 원에 5회 납품 계약을 한다. 여섯 번째부터는 4억9000만 원으로 깎아서 납품해 달라고 미리 말한다. 비용 절감을 하면서도 협력업체가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반면 국내 대기업은 5억 원에 1회 납품계약을 한다. 두 번째는 계약하지 않고 그냥 말로만 물건을 만들어놓으라고 한다. 물건을 다 만들어놓으면 ‘4억5000만 원에 주려면 주고 아니면 말라’고 한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연일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대다수 중소기업이 원하는 건 대기업의 몫을 중소기업에 이전해 달라는 게 아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관행이 정착되고, 받아 마땅한 대접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1997∼2007년 국내 수백만 개의 중소기업 가운데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는 119개사,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는 2개사에 불과했다. 중견기업 수는 미국이 전체 기업의 2.4%, 일본이 1.0%인 데 비해 한국은 0.2%로 유난히 적다. 한국에서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지 못한 데는 협력업체가 이익 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게 해온 대기업의 횡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몰아치듯 대기업을 압박한다면 단지 그때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선거용이나 집권 후반기 레임덕을 막기 위한 ‘손보기’로 이용되어선 더더욱 안 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은 국가의 미래를 세운다는 자세로 꾸준히 시스템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

신연수 산업부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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