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세상을 바꾸는 또 다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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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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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벌거벗어야 하나?”

1989년 미국 뉴욕의 버스들을 도배한 광고 포스터의 문구다. 화가 앵그르의 유명한 누드화 ‘오달리스크’의 얼굴에 고릴라 가면을 씌운 이 패러디 포스터는 단번에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미국 최대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미술섹션에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5%도 안 되는데, 이곳에 걸린 누드화는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친절한 정보도 포스터 안에 담겨졌다.

포스터는 1985년 결성 이래 익명으로 활동해온 여성예술가집단 ‘게릴라 걸스’의 작품이다. 이들은 포스터와 스티커, 출판 프로젝트와 함께 고릴라 가면을 쓰고 강연과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성차별, 인종차별을 비롯해 정치와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불공평 불공정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가차 없는 메시지엔 항상 유머가 깔려 있다.

예컨대 이들이 펴낸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란 책을 보면 ‘여성 예술가가 되면 좋은 점’을 이런 식으로 열거한다. 애인이 더 젊은 여자를 찾아 당신을 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작업에 집중할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천재로 불리는 민망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등등. ‘유머감각 없는’ 지금까지의 판에 박힌 페미니즘의 행태와 노선을 달리한다고 강조하는 이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기존 권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은, 반박하기 힘든 사실에 근거하여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부끄럽게 만드는 데서 나온다고.

소비는 풍성하나 시간은 궁핍하고 세상은 편리해졌으나 마음은 불편한 현대인에게 웃음만큼 결핍된 영양소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나 나는 웃는 걸 좀 배워야 해요./일생 박장대소할 일은 없었어도/눈물 때문에 웃음이 났던/철없던 때도 있긴 있었지요./의미없는 웃음이긴 했어도/그런 때가 있긴 있었지요./…/우리가 남길 일은 웃음과 즐거움뿐/하늘도 모르시게 웃어봅시다.’(김형영의 ‘당신이나 나는’)

서울 어느 대학이 큰돈 들여 캠퍼스 안 길을 유럽식 돌길로 포장했다. 미관상 평가와 상관없이 돌바닥에 구둣굽의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느 날 대학 주최 야외조각전에 한 여학생이 돌길 위에 녹색 카펫을 깔아놓은 작업을 출품했다. 그날 이후 개미들의 행진처럼 행인들은 죄다 카펫을 따라 걷는 진풍경이 나타났다. 대학은 다시 돌길을 걷어내고 보행자가 편히 다닐 수 있는 길로 바꾸었다.

공부도 취직준비도 건성이던 일본의 한 대학생은 문득 삶을 낭비하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도쿄 지하철역에서 매일 아침 쓰레기 줍기를 시작한다. 청년의 행동은 점차 호응을 얻고 4년 만에 그가 ‘쓰레기 줍는 날’로 정한 날이면 전국에서 10만여 명이 함께하는 자발적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밖을 향해 핏줄 세운 투쟁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유머, 목청 높이는 주장보다는 창의적 실천에서 나올 때가 많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집단행동으로 세를 과시하면서 내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는 해묵은 습성을 가진 사회일수록 새로운 시각과 열린 마음을 배워나갈 때 개혁도 소통도 이뤄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분노하거나 가르치려 들면서 ‘이것은 나쁘다’고 얘기하는 기존의 ‘정치적 예술’과는 길을 달리하려 한다. 그것은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격이다. 우리는 기존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사실과 멋진 시각 이미지의 바탕 위에서 이해하기 쉬운 말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한다.”(게릴라 걸스)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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