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일본 지식인 104명 ‘한국병합’ 원천무효 선언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1일 03시 00분


올해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일 지식인 213명(한국 109명, 일본 104명)이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원천 무효’라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양국 지식인은 5개월간의 토론을 거쳐 합의한 성명서에서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일본 측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사카모토 요시카즈 도쿄대 명예교수 등 저명인사들이 선언에 참여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한국 지식인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일본 정부를 향해 과거사를 직시하라고 촉구한 것은 초유의 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일본 지식인들이 한일병합이 원천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큰 진전으로, 향후 한일 간 역사 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을 희망하고 동아시아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이들의 충정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조인된 한일병합조약은 명백히 폭력과 강압으로 관철한 불법이었다. 우리에게는 이 조약이 원천 무효라는 사실이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가해국인 일본이 이를 완강히 부인함으로써 양국 간의 첨예한 역사적 쟁점이 됐다. 이번 성명도 ‘한일병합조약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이 공감하는 인식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야말로 두 민족 간 역사문제의 핵심이며 서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당초 ‘대등한 입장에서 양국의 자유의지에 따라 체결한 조약’이라고 주장하다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시절 한 걸음 물러나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조약 자체는 유효했다’는 ‘합법(合法) 부당론’을 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에서도 양국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원천 무효’라는 표현을 놓고 우리 측은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해석한 반면 일본 측은 ‘원래는 유효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효력을 상실했다’는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이번 성명에 참여한 일본 지식인들은 ‘불법으로 원천 무효’라는 한국 측 주장이 옳다는 점을 인정했다.

일본 정부가 역사적 진실에 눈감고 한일병합조약의 유효성을 고집하는 한 과거사 청산과 화해는 어렵다. 이 조약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것과 같다. 조약이 합법이었다면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독립투사들의 활동조차 불법이 되고 만다.

이 성명은 ‘미국 의회가 하와이 병합의 전제가 된 하와이 왕국 전복 행위를 100년이 경과한 1993년에 불법한 행위였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듯이 이제 일본에서도 새로운 정의감의 바람을 받아들여 침략과 병합,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천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번 성명의 일본 측 참여자 가운데 역사학자 등 학자들이 많은 것은 일본 학계의 분위기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에 따라 달라졌음을 보여준다”면서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본의 짐을 가볍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일본정부 역사교과서 왜곡부터 바로잡아야

그러나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됐던 일본 민주당 정권마저도 역사교과서를 통한 ‘과거사 감추기’를 강화하는가 하면 정치인들의 과거사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한일 지식인들의 한일병합조약 무효선언을 계기로 과거사 왜곡을 청산해야 한다. 그것이 피해국들과 진정한 화해 협력의 시대를 여는 길이다.

두 나라 정상은 한일병합 100년인 올해 안에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성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일본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19세기 후반 이후의 침략 시도 과정에서 1905년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했던 독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지금은 일본이 한일 관계 전반에 걸친 인식의 틀을 새로 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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