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형준]남들은 위기라는데 당사국만 모르는 불감증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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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그리스와 비교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5배는 더 크고, 국가 신용등급도 훨씬 높습니다.”

남유럽발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 올 3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가전 유통업체인 ‘메나헤 데 오가르’의 매니저는 스페인 경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지난달 말과 이달 초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의 경제상황을 현지 취재했다. 나라 곳간 사정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 ‘PIGS’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는 영국도 다녀왔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우리는 그리스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인테리어 디자인컨설팅회사 직원인 다니엘레 마사치 씨는 “PIGS 중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제조업 기반이 거의 없는 나라들 아니냐”며 “그리스는 전반적인 경제체질이나 국제적인 위상이 이탈리아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영국 국민들도 일부 경제전문가와 교수들을 빼고는 재정위기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런던 시내의 4성급 호텔에 근무하는 인도 출신 노머스 싱 씨는 “7년째 영국에서 생활하지만 재정위기를 피부로 느낀 적은 없다”며 “대규모 공사가 멈춰서거나 국민에 대한 사회복지가 크게 줄어든 것도 아니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취재를 할수록 PIGS 국가들과 영국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경우 교외로 1시간만 차를 타고 이동하면 재정이 부족해 짓다가 만 공사 현장을 여러 곳 볼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마취주사라도 맞은 듯 재정위기에 둔감한 것은 5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쏟아낸 대중영합적인 공약의 영향도 있다. 보수당과 노동당은 각각 ‘국민보험료 인상 억제’와 ‘25만 파운드 이하의 주택 구매 시 취득세 면제’처럼 재정에 치명적 부담을 주는 정책을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재정위기는 한꺼번에 쇼크처럼 닥치는 게 아니라 서서히 경제를 썩게 만든다. 도를 넘으면 그리스와 같이 국가부도 위험에 내몰리게 된다. 그리스에 이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용등급도 떨어지면서 PIGS 국가들은 차례로 중환자실로 향하는 모습이다. 외부인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위기를 정작 당사자들은 느끼지 못한 것이 PIGS 경제가 망가진 이유다. ‘한국의 재정은 안심해도 될 만큼 튼튼한가.’ PIGS의 비극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이자 교훈이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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