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용택]설이면 스물다섯 식구들이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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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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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며칠 앞둔 장날이었습니다. 아침에는 눈이 오지 않았는데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더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눈발이 굵어져서 급기야는 강 건너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순창 장에 가신 아버지가 걱정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대문 밖에 나가 아버지가 돌아오실 동구를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가고 또 나가 동구를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눈사람 된 아버지의 보따리

부엌에서 조청을 만들고 있는 어머니도 걱정이 되시는지 부엌문을 열고 나와 “웬 놈의 눈이 이렇게 많이 온다냐. 눈이 오는 게 아니라 퍼붓는구나. 퍼부어. 그나저나 차가 잘 다닐랑가 모르겄다”며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자욱하게 내리는 눈 때문에 마을엔 어둠이 일찍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하고 내가 밖에 나가 동구를 바라보다가 부엌에 들어가 벌겋게 타고 있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마루에서 쿵 소리가 났습니다. 화들짝 놀란 우리들은 문을 왈칵 열었습니다. 커다란 보따리를 마루에 내려놓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들은 놀랐습니다. 책보로 머리와 얼굴을 감싼 아버지는 눈사람 같았습니다. “포도시(간신히) 왔다. 길도 안보이더라.”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빗자루로 몸에 달라붙은 눈을 털었습니다. 형제들은 방 가운데 놓인 보따리에 달려들어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보따리 속에서는 두 누이동생의 옷가지와 네 형제의 옷이며 양말이며 고무신이 쏟아졌습니다. 우리 여덟 식구가 옷가지를 둘러싸고 앉아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 것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의 내복과 옷과 양말과 신을 찾아 입고 신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내 양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이 다 달려들어 시장에서 사온 물건 속에서 내 양말을 찾았으나 양말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샀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다시 여기저기 찾았지만 내 양말은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다가 어디서 흘린 모양이다. 나가 보자.” 어머니가 내버려두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등불을 들고 쏟아지는 눈 속으로 나섰습니다. 나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차부까지는 30분쯤 걸어야 했습니다. 자욱하게 내리는 눈발 속에 집집이 켜진 불빛이 따뜻했습니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던지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찾아 더듬거리며 어디 만큼 갔습니다. 앞서 가던 아버지의 발자국 속에 검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버지 거기 뭐예요.”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며 등불로 눈 속에 묻힌 검은 것을 비추더니 얼른 주워들었습니다. 아! 내 양말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눈길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식구들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새 옷을 입은 동생들과 내가 나란히 부모님 앞에 서 보았습니다. 옷과 양말과 신이 조금씩 컸습니다. 바짓가랑이는 두 겹씩 걷어 올리고 옷소매도 두어 번씩 걷어 올렸습니다. 양말과 신도 그렇게 컸습니다. 다음 설이 올 때까지 그 옷으로 겨울을 지내야 했으니까요.

섣달그믐이면 동네서 굿판

아! 새 옷으로 갈아입은 형제자매들이 부모님 앞에 서 있던 그 눈 많이 온 날 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방 안 가득 어른거리던 호롱불빛과 부엌에서 조청을 달이며 후드득 타던 장작불이 지금도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집집마다 그렇게 설이 다가왔습니다. 섣달그믐이 되면 집집마다 떡을 치는 소리가 들리고 동네 큰 사랑에서는 어른들이 동네 걸궁굿을 치기 위해 꽹과리 장구 징 등을 점검하느라 굿치는 소리가 동네를 울렸습니다. 우리 동네는 섣달그믐날 밤에 걸궁굿을 치곤했습니다. 집집이 돌며 풍악을 울려 주고 그해에 쌓인 액을 다 몰아냈습니다. 걸궁굿을 치면 사람들이 조금씩 쌀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쌀을 조금씩 부조 받아 다음 해 동네 자금으로 썼습니다. 설을 맞이할 모든 준비가 되면 사람들은 목욕을 했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데워 커다란 독에 물을 퍼 담아 식구들이 모두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해에 묵은 모든 때를 깨끗하게 씻고 세상에서 가장 캄캄한 섣달그믐밤을 맞이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들 모두 잘 커서 장가가고 시집을 가 그만그만하게 삽니다. 바로 밑 동생은 서울에서 삽니다. 셋째동생은 부산에서 살고, 막둥이는 남해에서 삽니다. 누이동생 하나는 대전에 살고 그 밑의 누이는 군산에서 삽니다. 어머니는 시골에 사시고 나는 시골을 오가며 전주에서 삽니다. 그리고 설이 되면 모두 모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남해에서 달려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동생들이 어머니 홀로 사시는 고향에 다 모이면 우리 식구는 모두 스물다섯입니다. 좁은 집이 꽉 차지요.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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