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송평인]독일의 反통일세력이 됐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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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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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진정한 바람을 이른바 양심적이라는 지식인들이 배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는 독일 통일의 역사에도 그런 측면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당초 동독주민이 원한 것은 동독을 떠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Wir wollen aus)’라는 시위구호는 이런 심정을 나타낸 것이었다. 딱딱한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의 자유, 출국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수많은 동독 주민이 체코로, 폴란드로, 헝가리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해 가을 라이프치히의 월요 시위가 시작되고 10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의 입에서 ‘우리는 여기에 남겠다(Wir bleiben hier)’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구호가 함께 등장했다. 동독의 주인은 공산당이나 슈타지(비밀경찰)가 아니라 인민이고 그 인민은 바로 우리라는 뜻이다.

동독 공산당의 진정한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동독에서 내보내 주기만 해달라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꿔 남겠다고 했을 때 단순히 여행규정 완화조치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태가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여전히 ‘우리가 인민이다’는 구호가 나오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했다. 동독 주민이 통일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라이프치히의 월요 시위를 주도한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 구성원 대부분은 단지 사회주의를 개혁하길 원했을 뿐이다. 노이에스 포룸의 구성원은 이른바 빌둥스뷔르거툼(Bildungsb¨urgertum·교양시민층)이라고 해서 작가 예술가 학자 교사 등 ‘먹물 든’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동독에서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박해 같은 것을 당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들은 시위대가 “우리가 인민이다”라고 선언한 데 대해서는 흡족해했지만 11월 9일 이후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고 외치고 나서자 깜짝 놀랐다.

어찌된 일인지 막상 통일을 앞두고 서독의 좌파 지식인 대부분도 통일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꺼리고 그 희망을 부추기는 세력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주간 신문 ‘디 차이트’의 테오 조머 같은 이는 “독일 통일의 해골을 납골당에서 도로 꺼내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테러를 안겨줄 뿐”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동독 주민은 단순히 통일도 아니고 하루빨리 통일이 실현되기를 원했다. 사실 그들이 원한 통일의 속도는 통일의 주역이 된 기민당(CDU)의 헬무트 콜 총리조차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오스카어 라퐁텐이 이끌던 사민당(SPD)은 이 과정에서 완전히 반(反)통일 세력이 됐다. 과거 동방정책을 이끌었던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속한 정당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민당이 통일 지연으로 초래될 수 있는 정치적 혼란은 아랑곳없이 통일헌법이 필요하다고 떠들고 있을 때 동독 주민은 계속 서독으로 넘어가면서 조속한 통일을 온몸으로 촉구했다.

결국 독일은 국민에게서 사랑받던 기본법을 그대로 둔 채 초단기간인 11개월 만에 통일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툭하면 분단의 모순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진짜 통일을 필요로 하는 순간, 그것을 요구하는 인민 앞에서 반(反)통일세력이 되는 극적인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송평인 파리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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