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치영]아이티에서 생각한 리더십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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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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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아이티에서 지진을 취재하다 만난 사람들의 삶은 처참했다. 허기를 때울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몸을 눕힐 방을 바라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천막을 나뭇가지에 걸쳐 놓고 땅바닥에서 자는 주민이 사방 천지에 깔려있었다. 이들의 눈빛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는 어려웠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남서쪽으로 40여 분 떨어진 카르푸르 인근의 한 고아원에서 만난 리스넬(6)과 타미(3)는 말할 힘도 없는지 아무 말도 없이 먹을 것을 달라는 듯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이는 그 나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키가 작았다. 리스넬의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은 채 간신히 서 있는 타미의 비쩍 마른 다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대통령궁 앞 천막촌에서 만난 마르다 씨 일가족은 지진 대참사가 발생한 12일 주저앉은 집을 나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르다 씨는 “사흘간 전혀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는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조카 2명을 가리키며 “여동생 부부가 숨지는 바람에 조카 2명을 내가 데리고 있다”며 울먹였다. 빈민촌 임시병원에서 만난 21세 처녀 애슐라 씨는 팔과 다리가 으스러졌는데도 나흘 동안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독재와 가난, 허리케인, 홍수에 지진까지…. 이들은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걸까. 사실 아이티 국민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1804년 나폴레옹의 군대까지 물리치며 독립을 쟁취했다. 흑인 노예가 세운 세계 최초의 나라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였다. 중남미 국가의 독립을 지원하는 전초기지 역할도 했다. 지금은 아이티보다 훨씬 잘사는 도미니카공화국을 한때 지배하기도 했다. 당시엔 카리브 해 연안국가 가운데 아주 잘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이런 아이티가 서반구(西半球)의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탓이 크다. 독립 이후 100년간 지배계층은 정쟁과 쿠데타, 암살을 일삼았다. 지도자들은 국가재산을 해외로 빼돌렸고, 정치인들은 부정부패로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정신이 없었다. 현재 1%의 부유층이 국부의 50%를 소유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 출신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가난한 사람의 대변자를 자청해 1990년 첫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그 역시 수억 달러를 해외로 밀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6년 5월 취임한 르네 프레발 현 대통령도 아이티 국민을 가난과 혼란에서 구해낼 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다.

아이티 국민은 정부와 지도자에게 더는 바라는 게 없는 듯했다. 실업률이 80%에 이르지만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국경에서 만난 웨슬리 벨릭스 씨(24)는 “프레발 대통령은 최소한 대량학살을 하지는 않았으니 그 정도면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의사소통이 될 정도로 똑똑한 그는 유럽의 대학에서 공부해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아이티에 머물면서 한 나라 국민의 삶에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생각했다. 고아원에서 만난 타미, 천막촌에서 만난 마르다, 그리고 벨릭스 씨 모두 앞으로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조금이라도 편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치영 뉴욕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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