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영혜]호화 청사와 사우나 옷장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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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외모가 중요할까, 내실이 중요할까. 미모로 치면, 서양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헬렌이 있고 이웃 중국만 해도 양귀비나 서시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겐 역사적으로 경국지색이나 절세가인의 스토리가 별로 없다. 그럴 정도의 미인이 없어서였는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나 예찬이 부족해서였는지 때로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최근의 우리에겐 외모가 대세인 것 같다. 성형의술의 종주국을 자부하기에 이른 것도 그런 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외모열풍의 성과인지 서울에 온 외국인들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한국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패션 감각이다.

얼마 전 택시를 타고 서울 이태원 부근을 지나던 중 길 옆의 거대한 신축 건물을 보고 흠칫 놀란 일이 있다. “아니, 이게 뭐죠?” 하고 기사에게 물으니 새로 지은 용산구청이라 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또 놀랐다. 건물 외벽에 거대한 무궁화 마크와 함께 간판처럼 용산구의회라고 커다랗게 쓰인 것 때문에. 나중에 들으니 그 건물은 호화청사라고 이미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데 그날의 개인적 느낌으로는 호화라기보다는 참 괴이하다는 것이었다. 주변 경관과의 어울림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참 거창하고도 특이한 모습 때문에 놀랄 정도였으니. 그러고 보니 건물에도 유행이 있나 보다. 새로 지은 구청 청사들은 하나같이 비대칭 아니면 가분수의 유난스러운 모습에다 유리로 뒤덮여 차가운 느낌 일색이었다. 거기다 원스톱 서비스를 내세우며 구의회, 문화센터 등을 한곳에 몰아넣어 크기는 다들 대단했다.

겉모습 멋지지만 속은 구태의연

20년 전 서소문의 옛 법원 청사에 개원한 서부지원에 부임했던 일이 생각난다. 새로 생긴 법원이다 보니 책상 소파들을 새로 들여왔고, 당시의 총무담당자는 꽤 비싼 거라며 생색을 냈었다. 하지만 그 책상은 혼자만 크고 최신이어서 낡은 철제 캐비닛, 허름한 사무실 분위기와 안 어울렸다. 소파도 방 크기에 비해 너무 컸다. 솔직히 왜 그 돈 주고 이런 것들을 샀나 싶었다. 차라리 창고로 쫓겨난 검정 나무책상이 세월의 연륜과 깊이가 배어 있어 아까웠다.

하지만 이제 20여 년이 흘러 관공서들이 저렇게 첨단의 청사들을 지으니 내부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소위 호화청사가 대개는 쓸데없이 로비만 요란하지 정작 일하는 공간은 별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판사로 재직할 때 외국의 법원이나 관공서, 학교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청사는 역사나 품위로, 그리고 분위기로 압도했지, 건물의 위용이나 규모로 기죽이지 않았다. 서양은 사람들도 크지만, 그곳에 자라는 동식물도 다 큰 게 신기했었는데, 의외로 그들은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건물은 겉으로는 소박한데 들어가 보면 쓰임새 있는 공간도 많고 구석구석 잘 꾸며져 있다. 미국 뉴저지 주 연방법원의 톰슨 판사 방도 와인색 책상과 가죽의자가 멋진 조화를 이루었던 기억이 있다. 복도에는 유명 화가의 난해한 그림보다는 법원의 역사와 자료 등이 전시되거나 역대 판사들의 중후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는 다른 관공서나 학교도 비슷했다.

사실 관공서는 그 나라의 얼굴이라고 한다. 우리가 별로 잘사는 나라로 치지 않는 동유럽 국가를 가도 관공서는 겉보다는 내부가 품위 있게 제대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의 판사실은 아직도 문이나 벽이 온통 철제다. 화재예방 때문이라고 하지만 대개 기관장 방은 목재로 되어 있는 걸 보면 꼭 그 이유도 아닌 것 같다. 결국 견학 온 아이들로부터 컨테이너 박스 같다는 평을 듣고야 말았다. 그뿐인가.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보면 겉모습은 멋지지만, 번쩍이는 황금색 엘리베이터는 유흥주점을 연상케 하고, 역대 기관장 사진을 죽 걸어놓은 모습은 영정사진이 따로 없다고들 한다. 사무공간 개선사업으로 모처럼 철제 캐비닛이 물러난 자리에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사우나 옷장이다. 민원인들 드나드는 공간의 벽과 바닥이 온통 시멘트라 흡음(吸音)이 안 되어 웅성웅성 시끄럽기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우리의 파출소 책상이 늘 취객의 발길에 차이고 기동대 버스가 툭하면 수모를 당하는 것도 허술한 모습 때문이라는 지적도 귀 기울일 만하다.

보여주기 콤플렉스 벗어날 때다

새해 첫날,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이제 우리의 화두로 ‘품격’을 제시한 걸 봤다. 이는 우리의 성품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공간에도 해당되는 주제일 것이다. 외모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외모 열풍이 거세다고 관공서 건물도 온통 외모에만 치중하는 건 아쉽다. 이제는 보여주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내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김영혜 객원논설위원·변호사 yhk888@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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