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점프하는 순간 땅이 아니라 앞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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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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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스노보드 강습을 받았다. 번잡한 스키장 구석에서 커피나 홀짝거리느니 사진이라도 찍어줄 요량으로 아이들이 레슨 받는 데 끼어드는 만용을 부려본 탓이다. 아직 학생이라며 아저씨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보이던 보드 강사는 양발로 5 대 5 균형 잡기와 방향 틀기 같은 기본기술을 가르치며 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 등을 펴시고, 무릎을 자연스럽게 구부린 상태에서 눈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라보세요. 그쪽으로 스르르 밀려가지요?” “멀리 시선을 둬야 속도를 내도 흔들리지 않고 무섭지도 않아요.”

시선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어디 보드뿐이랴. 스키나 골프 같은 운동은 물론이고 퍼블릭 스피치, 인터뷰 상황, 강의에서도 시선 처리는 중요한 성공의 관건이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가 멀리 내다보며 ‘비전을 갖는 일’ 또한 그러할 것이다. 방향을 잡아주고 끌어주는 무한한 중력, 기술이나 체력 이전에 갖춰야 할 것, 흔들리거나 두렵지 않게 잡아주는 버팀목, 계획이나 전략을 수정하게 하는 힘. 비전이란 대략 그런 것이다.

보통사람의 머리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큰 액수와 그 이상의 효과가 기대되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소식으로 이미 새해가 온 즐거운 착각에서 연말을 보냈다. 그러나 경제가 살아 꿈틀거리는 기운을 전하는 각종 낭보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오히려 그런 휘황한 경제적 성과에 함몰되어 가뜩이나 시계가 흐릿한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비전이 더 혼탁해지진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잡아주고 끌어주는 중력 ‘비전’

교육의 목표가 입시나 취직이 아니고, 성공이 인생의 목표일 수 없듯이 잘사는 것이 한 나라의 비전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니 정보화니 하는 말은 가치 구현의 방법이지 비전 자체는 아니다. 비전이란 우리 사회가 지닌 가치체계의 지향점이자 합의된 문화이다. 레이저의 끝처럼 강렬하고 어두운 활주로의 방향등처럼 절실해서 믿고 질주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무엇이 우리를 질주하게 하는가. 우리 사회를 떠받드는 가치는 무엇이고 공유하는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은 일찌감치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세계의 비전을 갖고 출발한 나라이다. 초기 이상이 높고 아름다워서 지금까지 후손들은 국가에 대한 정서적 안정과 자부심을 안고 산다. 건국 초기 루이지애나 합병으로 미국 영토를 확장시킨 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고 싶어 했던 토머스 제퍼슨의 비전이었다. 흑인을 노예에서 해방하고 마침내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도 미국이라는 사회의 비전이었다. 서구 시민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었고 합리성과 정직함, 개성의 존중이 중요한 가치로 숭상됐다. 한국인의 정신에 깃든 궁극적인 가치관은 무엇일까.

기업이나 개인에게도 비전은 필수 덕목이다. 존슨&존슨은 인공관절 사업을 하며 ‘움직임의 즐거움을 되찾는 것’을 비전으로 내세웠고 맥도널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건강하며 즐거운 식당 경험을 고객들에게 주는 것’이 비전이다. 기업이 비전을 갖는 것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뿐 아니라 창조적 해결책을 가져오고 조직원의 참여와 충성심을 높이는 순기능이 있다. 개인도 자신의 ‘비전 성명(vision statement)’을 써봄으로써 스스로 가치관을 확인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개인의 비전 성명은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모아보고 이미 달성된 모습을 그리며 현재형으로 기술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시대적 지향점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선 독립을 지향했고 전후와 1960년대에는 가난 탈피와 산업화에 전력했고 이어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참살이(웰빙)라는 삶의 질에 눈떠보기도 하고 배려와 나눔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녹색성장을 기축으로 하는 새로운 선진화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눈부신 발전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대적 지향점을 관통하는 우리의 비전, 합의된 가치는 무엇인가? 사회정의에 대한 의식, 평등의 구현, 자유의 가치에 대한 합의가 있는가? 정직, 염치, 개인성의 보호와 공공의 의무 준수, 이런 개념에 익숙한가? 그동안 우리를 숨 가쁘게 달리게 했던 근면 자조 협동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새로운 세계 구도 속에서 멀리, 바로, 빨리 가기 위한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세워야 할 때다.

멀리 뛰려면 새로운 가치 세워야

새해 첫날이다.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대표’에서 부상한 형을 대신해 나선 강봉구는 스키점프대에 서기 전에 이렇게 되뇐다. “점프하는 순간 땅이 아니라 앞을 본다.” 우리도 점프하기 위해서 이제 앞을 봐야 한다. 그러자면 다 함께 눈을 모아 바라봐야 할 지향점이 분명해야 한다. 비전이 있어야 한다.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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