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외국어高 잔혹사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3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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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고(외고) 입시가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정치권에서 ‘외고 폐지론’이 대두되자 외고 교장들은 ‘마녀 사냥’ 식 발상이라며 반발했다. 사교육의 근본 원인은 따로 있는데 외고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외고 폐지론자의 한 명인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외고는 분명히 마녀”라고 못 박았다.

各種학교에서 ‘魔女’까지

1984년 ‘각종(各種)학교’로 출발한 외고는 오늘 ‘마녀’로 변신하기 까지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의 학교 분류방식에 따르면 각종학교는 요리 간호 자수 등의 기능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에 해당한다. 외고 중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대원외고와 대일외고는 개교 당시 ‘대원외국어학교’ ‘대일외국어학교’였다. 외국어 ‘기능’을 전수하는 학교가 불과 25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고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힌 평준화 체제 속에서 ‘외톨이’ 같은 존재였던 외고는 온갖 외풍에 시달려 왔으며 그때마다 재학생들에게 깊은 내상(內傷)을 안겨주었다.

외고는 전두환 정권 시절 탄생했다. 1974년 평준화제도 도입 이후 하향 평준화의 부작용이 커지고 보완하라는 여론이 높아지자 과학고와 외고를 신설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과학고는 처음부터 정식 고교로 인정했던 반면에 외고는 격을 낮춰 각종학교로 허가했다. 1987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평준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지지 기반으로 여겨온 중산층에서 평준화에 불만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 정부는 ‘평준화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한걸음 물러서 특수목적고를 확대해 평준화를 보완하기로 결론 내렸다. 1992년 외고는 정식 고교가 됐다.

외고는 어렵게 제도권으로 들어온 뒤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94년에는 집단 자퇴 사태가 벌어졌다. 한 외고는 재학생 10명 가운데 4명꼴로 그만 둬 썰렁한 교실이 됐다. 내신 성적이 원인이었다. 명문대에 합격하려면 내신 성적이 중요한데 외고에는 우수한 학생이 몰려 있어 높은 내신점수를 받기가 힘들었다. 학교를 그만 둔 뒤 검정고시를 치르면 내신 성적과 상관없이 진학할 수 있었다. 자퇴 소동은 해마다 계속됐다.

2000년대 들어 정부가 대학입시에서 내신 반영을 더욱 강화하면서 외고 재학생들은 설움을 감수해야 했다. 정부의 입시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국립대학 서울대는 외고 학생들에게 ‘넘기 힘든 벽’이었다. 일반고 출신 수험생에 비해 수능시험 점수가 훨씬 높으면서도 입시에서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흔했다. 평등교육을 강조했던 지난 정권에서 외고 재학생은 천덕꾸러기 수준으로 전락했다. ‘외고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말이 고위 관리 입에서 공공연히 나왔다.

그러나 민심은 달랐다. 지자체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저마다 ‘특목고 유치’를 공약했다. 외고 진학 열기는 내신의 불리함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교육수요자들이 더 질 높은 교육에 목말라 여전히 외고를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의 質바라는 민심을 봐야

한국 사회에서 외고의 의미는 이런 괴리만큼이나 이중적이다. 명목상으로 외국어 인재를 키우는 학교지만 정부도, 학부모도 속으론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정부는 평준화 체제 속에서 ‘외고’라는 이름으로 명문고를 용인해준 것이고, 학부모는 자녀를 외고에 보내면 명문대 진학에 유리하리라고 판단해서 보낸다. 외고에서 외국어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외고의 가시밭길은 정권의 사교육비 억제 의도와 학부모의 차별화된 교육 욕구가 충돌한데서 비롯되고 있다. 학부모의 욕구가 해소되지 않는 한 정치권이 외고를 어떤 형태로 바꾸더라도 사교육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중도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외고의 입시방식을 사교육 수요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개선하는 것이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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