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 큰 족적 남기시고… 故최규하 前대통령을 떠나보내며

  • 입력 2006년 10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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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고 맑았던 가을 하늘에 구름이 덮이고 궂은비가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었나 봅니다. 임께서는 그날 이른 아침에 눈을 감으시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뒤에 남은 저희들에게 하늘도 슬퍼함을 일깨워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지러운 나라, 마음이 어둡고 무거운 저희는 어찌하라고 이렇게 떠나가셨습니까. 나라를 지키고, 온 국민이 잘살고, 갈라진 나라를 통일하려면 임의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렵고 중요한 때에 눈을 감으시다니, 그 비통함은 어디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임께서는 건국 초기에 뛰어나신 국제 감각으로 한국외교가 탄탄한 기틀을 잡는 데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재일동포 북송 반대를 위한 국제적십자연맹과의 교섭, 한일 간의 교착된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추진은 일선외교관으로서 큰 몫을 하신 사안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대사로 재직하시다 외무부 장관으로 발령을 받으시고 어머님에 대한 극진한 효성으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좋아하시는 노래가 ‘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이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해 북한이 특수부대를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시켰던 1968년의 1·21사태로 미국의 사이러스 밴스 특사가 서울에 왔을 때, 임께서는 타워호텔에서 커피 30잔을 마시면서 끈질긴 교섭 끝에 우리 요구를 관철하셨습니다. 밴스 특사가 “허리가 아프니 쉬었다가 하자”고 하면서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정례화, 예비군 100만 명의 무장, 신예 전투기 공급에 합의한 일은 임께서 교섭을 조리 있게 밀고 나간 끝에 얻어낸 소중한 소산이었습니다.

4년 넘게 외무부 장관에 재직하신 후, 대통령 외교특보로 재임하시면서 6·23선언을 기초하여 남북 간의 평화정착을 위한 박 대통령의 구상을 가다듬은 것은 기리 빛날 업적이었습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당시에는 대통령 특사로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시어 그 나라 국왕에게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유를 전량 공급하겠다는 확약을 받아오셨습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저녁도 들지 않고 기다리시다가 청와대로 들어서는 임의 등을 두드리시면서 “일등공신이 왔다”고 기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원유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경제발전은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무총리의 중책을 맡으신 임께서는 온후하고 대범하신 성품으로 국정 전반을 관리하시다가,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당하셨습니다. 아무도 예기하지 못했던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고 의연한 자세로 사태를 수습하고 국정을 흔들림 없이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대통령이란 막중한 자리에 오르신 후 임께서 걸으신 길은 퍽이나 험난했습니다. 1980년 5·17 전국계엄 확대조치와 광주에서의 상황은 수습하기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임께서는 수난의 역사를 헤쳐 나가시면서 “역사는 불연속의 연속이고 연속이면서 불연속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해를 넘기시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신 후 임께서는 초야에 칩거하시면서 검소하고 청렴한 품성으로 나라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뜻에 맞지 않는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져도 아무 말 하시지 않고 참고 견디셨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셨으니 하시고 싶은 말도 하실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저희는 임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말, 속에 품으셨던 큰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압니다.

저희들은 이 어려운 때를 맞아 슬픔을 이겨내고 용기를 되살려 임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귀감으로 삼아 부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해 나갈 것입니다.

임이시어, 이제 큰 짐을 벗으셨으니 생전에 못다 하신 일들을 저희에게 맡기시고, 높이 하늘나라에서 이 땅을 굽어 살피시면서 고이 잠드소서.

최호중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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