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경제관료의 가벼운 입

  • 입력 2006년 5월 21일 1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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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거품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기억이 떠올랐다. 10년 전쯤 외환위기가 터지기 얼마 전이다. 김영삼 정권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한 경제관료는 "은행도 부도가 날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경제계를 향해 날렸다. 그때까지 은행은 사실상 국가가 보증하는 기관이었으니 충격적인 얘기다. 더구나 한보사태로 인해 은행부실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 말은 폭탄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발언의 의도는 정부가 개별기업의 부도에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고 지원할 의사도 없다는 뜻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터에 정부가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미국에선 실제 작은 은행은 부도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 자본가들은 한 귀로 흘려듣지 않았다. 국내 기업과 은행을 겨냥한 발언이었지만 한보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을 주시하고 있던 국제 금융가의 반응은 달랐다. 한국에서 빠져나가려던 외국 자본에게 좋은 구실을 주게 된 것이다. 한국의 기업과 은행은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렵게 됐다.

국가부도마저 걱정해야할 처지가 된 경제부총리는 "금융기관의 모든 대외채무를 정부가 보증하겠다"며 뒷수습에 나섰지만 불감당이었다. 금융기관이 꾼 돈을 못 갚게 되면 국민세금으로라도 갚아주겠다는 과감한 선언이었지만 별무효과였다. 오히려 '얼마나 다급했으면 정부까지 나서 보증을 서겠느냐'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10년전 외환위기 부채질한 은행부도론

요즘 부동산 거품 붕괴를 경고하는 경제관료를 보면 10년 전 일을 되풀이하는 듯하다. 강남 등 '버블세븐' 지역의 거품 붕괴를 지적하는 청와대 인터넷사이트의 경고를 계기로 쏟아져 나오는 경제관료들의 발언은 한계를 넘고 있다. 이달 초 '부동산 세금폭탄 아직 멀었다'는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동산 거품을 걱정할 때가 됐다'는 정문수 청와대 경제보좌관의 발언을 포함하면 2주 이상 '부동산 공격'이 계속됐다.

경제문제에 대해 이번처럼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이슈화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외환위기 전 '은행부도론'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줄기차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격'에 가담하는 상황에서 집이 있든 없든 간에 국민들이 불안해 하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다.

국민의 불안한 정서를 감안했음인지 정부 당국자들이 재빨리 뒷수습에 나섰다. 경제부총리가 나서 "한꺼번에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고 정부 일각에서는 '거품붕괴가 아니라 연착륙이 목표'라는 소리도 나왔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연착륙이 목표라고 했어야 옳다.

선거에 경제를 볼모로 삼지 말라

부동산 거품 붕괴가 가져올 위험을 무릅쓰고 경제관료들이 거품붕괴론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왜 일까. 정치적인 동기가 다분하다고 본다. 버블 세븐 지역에 세금폭탄을 투하하고 거품 공격을 하면 선거를 앞두고 표 모으기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무주택 젊은 층과 유주택 노년층, 버블 세븐지역과 기타 지역으로 대결 구도를 짜려는 듯한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집없는 사람, 버블 세븐 지역에 집이 없는 사람의 표를 얻기 위해 부동산 거품 붕괴론을 들고 나오기에는 지금 우리 경제가 불안하다. 환율과 주가는 급락하고 유가는 치솟고 있다. 게다가 현대자동차 사건의 여파로 한국 기업들은 국제 금융가의 주시 대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꺼지면 은행이 무너지고 경제 전체가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경제를 볼모로 삼는 선거용 캠페인'이 극성을 부리게 되면 경제는 한참 뒷걸음칠게 분명하다. 정부는 선거용 구호를 접고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부터 보여줘야 한다. 섣부른 '은행부도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가.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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