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엄상익/'도-감청' 못밝힐 이유있나

  • 입력 2003년 10월 7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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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에서 도청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정부는 그동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 휴대전화의 도청은 불가능하다고 국민을 안심시켜 왔다. 그러면서도 정부 스스로는 도청방지를 위한 비화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일부 국무위원과 대통령비서관들에게는 도청방지 칩이 장착된 휴대전화를 지급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주한미군은 도청방지를 위해 미국 퀄컴사의 제품을 들여와 승인신청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국민상대 권력기관 교만 엿보여▼

정부의 이중 잣대를 보면서 도청을 당해도 되는 사람과 보호받는 특권층이 따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 그 배경에 있는 도청기관의 교만도 들여다보인다. 도청을 하는 기관은 국무위원을 비롯해 국민 누구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국민의 도청공포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 휴대전화를 둘 이상 가진 사람이 흔하다. 항상 도청을 당한다는 피해망상증 환자도 많다.

사실 도청(감청)이나 그 방지 기술은 국가적 사업으로 더 철저히 개발해야 한다. 첨단과학기술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국가안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다. 마약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유괴범으로부터 내 아이를 찾기 위해 감청은 절실하다. 군 지휘관의 통신을 체크해서 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방지할 수도 있다. 국가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감청 기술은 필수적이다.

앨빈 토플러는 그가 쓴 ‘미래의 충격’에서 미국의 첩보위성이 세계 각국을 내려다보면서 개개인의 말 한마디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미 중앙정보국(CIA)은 첩보위성이 보낸 사담 후세인의 목소리를 분석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토플러는 미국의 감시 속에 있는 나라들이 과연 완전한 주권국가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나라를 통과하는 미국 첩보위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완전한 주권국가라고 쓰고 있다. 듣기에 따라선 정보통신 강대국의 오만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아무튼 첨단과학을 바탕으로 감청 기술을 발전시켜야 할 우리 정부책임자들은 그리 떳떳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원죄의식이 깔려 있다. 도청을 통한 ‘정치사찰 정보’는 어느 정권에나 강한 무기이고 버리기 힘든 유혹이었다. 개개인의 정치성향을 파악하고 반대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도청은 정권을 유지하고 적을 제거하는 무기로 악용돼 왔다.

바로 그런 행위들의 업보가 국민적 도청공포증의 원인이다. 아마도 예전의 도청주체가 지금은 더 심한 피해의식을 느낄 것이다. 휴대전화가 생활의 필수도구로 됐다. 간첩이나 범죄자가 아니라면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예전의 비밀경찰이나 감시자는 차라리 순진했다.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국가라면서 과학장비로 남의 휴대전화 대화를 몰래 듣는다면 전제주의 시대보다 더 교활한 국민통제일 것이다.

필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제정 때 ‘법 기술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국가와 사회를 적이나 범죄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감청은 필요했다. ‘도청’이 아닌 ‘감청’이란 용어는 그래서 만든 것이다. 남용을 막을 통제절차를 전제로 법적으로 감청을 인정했다.

그러나 법이 없어 공포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감청설비와 인원, 그리고 이를 장악하는 주체를 어떻게 견제하느냐하는 문제다. 몇 명의 권력 핵심만 그것들을 독점한다면 합법적인 감청도 무서운 흉기로 변할 위험성이 크다.

▼남용 막는 견제장치 보완을▼

권력은 남용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음지에서 몇 명만이 엿듣고 검은 웃음을 흘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모든 부정부패는 독점에서 나온다. 도·감청에 대한 일체의 시스템 역시 독점형태에서 공유로 바꿔야 한다.

몰래 구석에서 은밀히 도청자료를 즐기는 도청 주체도 그 자리에서 나오면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 영원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유연하지 못한 것 같다. 시인할 것은 정직하게 시인하고, 감청이 남용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야 한다. 동시에 국가 사회의 안전을 위한 감청 기술개발의 필요성은 그것대로 따로 인식시켜 나가면 된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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