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창간83돌에 최정호 교수 특별기고

  • 입력 2003년 3월 31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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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송수남 화백이 동아일보 창간 83주년을 맞아 그린 소나무. 작가는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동아일보가 꿋꿋이 지켜온 언론의 길을 되돌아보면서 미래에도 힘차게 뻗어 나갈 기상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간(諫)한다는 말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언론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잘못을 말로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다만 어버이가 자식의, 군주가 신하의 잘못이 아니라, 자식이 어버이의, 신하가 군주의 잘못을 말로 일러 바로잡는 것을 ‘간’이라 한다.

오늘날 국민 주권의 민주 사회에서도 제도적인 언론조차 대통령이나 그 자식들의 비리를 제때에 밝히기를 꺼리는 걸 본다면 하물며 충효(忠孝)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전통 사회에서 자식이 어버이에게, 더욱이 신하가 군주에게 간하는 어려움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선비들은 군왕 앞에 바른말로 간하기를 주저치 아니 했다. 바른말로 간하는 언로(言路)의 열림과 막힘은 나라의 흥망에 직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비 直言정신 이어가야▼

19세기말 이 땅에 최초의 근대적 민간지를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은 ‘독립신문’의 첫 논설에서 “우리는 바른 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 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일 터”라 밝히고 나섰다. 자유주의 언론의 핵심적 역할인 ‘정부 감시 기능’을 맡고 나서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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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젠 美뉴욕대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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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선비들의 직언(直言)과 간쟁(諫諍)의 정신, ‘독립신문’의 정부 감시와 부정 고발의 정신은 한국 언론 600년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83년의 연륜으로 한국의 모든 언론 매체 가운데서 가장 긴 민족의 사회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동아일보는 이러한 전통에 뿌리내리고 다시 이러한 전통을 어려웠던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더욱 키워 굳혀 왔다. 일제 강점기 통치 하에서, 광복 후 한반도 소비에트화의 위협 속에서, 정부 수립 초기의 권위주의적 대통령 밑에서, 그리고 30년 군부 정권의 ‘개발 독재’ 체제 하에서…. 동아일보는 그 고난들을 잘도 버티고 이겨왔다. 그러한 자랑스러운 동아일보의 과거는 미래에도 계속될 시련을 용기 있고 슬기 있게 이겨갈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완전한 정부, 깨끗한 권력은 없다. 그렇기에 정부 권력을 감시 고발해야 하는 신문도 눈을 감고 잠들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년의 이른바 ‘문민’ ‘국민’의 정부가 보여준 것처럼 민주화가 곧 부패와 비리의 종착역도 아니오, 민주화된 사회라 해서 언론의 정부 감시 기능과 부정 고발 기능이 깃발을 거둬도 좋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걸 비싼 대가를 치르며 지금 배우고 있다.

▼도전하는 ‘권력 쪽 매체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문은 언론계 내부에서도 만만치 않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방송은 공영의 간판을 쓰고 다시 권력의 편에 나부끼고 있고 과거 어떤 매체보다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가장 널리 보급되고 있는 인터넷은 특히 젊은 세대에겐 전통 매체를 압도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한 인터넷 네티즌의 압도적 지지로 권좌에 오른 대통령이 앞으로 ‘국민 참여’의 민주정치(plebiscitarian democracy)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할 때 그것이 아직도 취약한 이 나라의 ‘대의제’ 민주정치(parliamentarian democracy)의 앞날에 무엇을 가져올지 주의해 봐야 할 것이다. 언론계 밖에서 정치권이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도전에, 언론계 내부에선 인터넷과 그 네티즌으로부터 신문이 받고 있는 도전이 대응하고 있다.

게다가 비(非)엘리트적이오, 일방 소통 아닌 쌍방 소통의 매체인 인터넷의 여론은 그 명분과 참여 폭에 있어 당연히 일방 소통의 식자 매체인 신문의 우위에 설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거 제도를 절대 배제하려는 생각이 독재자적 발상인 것처럼, 근소한 표차로 당락이 갈라지는 선거 결과를 절대화하려는 생각도 독재자적 발상이다.

▼나라의 중심 세워야한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독재자 히틀러는 무력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전의 승리로 합헌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렇대서 히틀러에 표를 몰아준 독일 국민이 아프리카의 어느 바나나 공화국의 유권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칸트와 마르크스, 괴테와 베토벤을 배출한 나라의 유권자들이었다.

선거란 언제 어디서나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정치꾼들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늘처럼 받들겠다”고 뇌까리는 ‘국민’도 원래 그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국민을 무시하겠다는 자도 위험한 자이지만 그러한 국민을 절대시하겠다는 자도 수상쩍은 자이다.

조선 시대의 대언론인 율곡(栗谷)은 일찍이 공론(公論·공명한 논의)과 부의(浮議·천박하고 경솔한 논의)를 구별하고 “부의란 뜬 소문과도 같아서 그 출처를 알 수도 없는 것이 처음에는 미약하나 점차 무성해져 나라의 중심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라 경계하였다. 율곡의 시대와 현대가 다른 것은 오늘날의 부의는 인터넷이란 매체를 장악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뉴미디어의 시대에 전통 미디어인 신문의 역할과 비중은 더욱 막중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의를 가라 앉히고 공론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공론은 나라의 원기(公論者 有國之元氣)”이다. 100년을 바라보는 동아일보가 계속 그러한 공론의 큰 그릇으로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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