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의 6·15선언 들여다보기(1)]이젠 말보다 실천으로

  • 입력 2000년 6월 16일 18시 50분


이번 정상회담은 분단민족사에 거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회담과정에서 나타난 분위기와 합의내용이 분열과 대결의 반세기를 마감하고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회담의 두드러진 성과는 대략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번 회담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한 지도부가 서로 인간적 신뢰구조를 쌓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보였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공항 영접과 환송, 양 정상이 주최한 만찬과 오찬, 두 차례의 정상회담 등 2박3일간의 짧은 일정 속에서 남북 지도자들은 많은 행사를 치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북한의 핵심인사들이 우리측 인사들과 격의 없는 접촉을 했으며, 김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북한의 국방지도자들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존경의 예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측이 보여준 이러한 노력은 과거 중국 등 사회주의 우방국가들에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라 더욱 돋보였다. 결국 양 지도부 사이의 인간적 신뢰구축 노력은 남북간에 긴장을 완화하고 향후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남북간에 거론될 수 있는 문제들을 거의 모두 논의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두 정상은 이산가족이나 경제협력과 같은 쉽고 시급한 문제만이 아니라 핵, 미사일, 주한미군, 국가보안법 문제 등 예민한 현안과 통일방안의 거시적인 방법까지 거의 빠짐없이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적대하는 쌍방이 화해협력으로 전화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다. 그러나 이 역지사지는 상대방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바로 이점에서 양 지도자가 직접 만나 상대방의 입장을 파악함으로써 남북간에 진정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본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남북공동선언문으로 나타난 합의가 지닌 의미다. 남과 북이 가장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의미하는 ‘선언’을 최고지도자간에 채택했다는 것은 이 합의의 의미를 강화시키고 실현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북한은 그 동안 어느 나라의 정상과도 공동선언을 채택한 적이 없다. 남과 북이 민족 내부적 관계라는 특수관계에 양 정상이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에 공동선언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과 북은 공동선언에서 역사상 최초로 현실적인 안목에서 통일방안에 대한 의견접근을 이루었으며 이산가족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에 합의했다.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도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추상적 합의 이면에는 보다 구체적인 실천의지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공동선언문은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양측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당국간 대화기구를 조속히 설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말을 아끼고 대신에 실천에 무게를 두는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구정치인들이 한탄하고 후회하게 만들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은 말싸움과 상대방 제압을 위해 끊임없이 제로섬 게임에 몰두했던 구시대적 작태를 청산하자는 뜻으로, 이는 남측이 견지해온 실사구시적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번 공동선언은 양 정상이 장시간에 걸쳐서 꼼꼼히 따져가며 만들었으며, 쟁점부분은 장기적 과제로 두고 실천 가능한 부분들은 구체적으로 합의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과거 어느 합의서보다도 실현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확인된 것도 대화의 정례화와 함께 합의내용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디딤돌을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 민족화해의 이 분위기와 합의를 소중히 발전시켜나가는 노력이 수반돼야만 비로소 우리는 평화로 나갈 수 있다. 즉, 이제 출발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성과에 너무 들뜨지 말고 차분하게 합의내용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북한과의 합의사항 실천 협의에서 세세한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호양(互讓)의 정신을 발휘하면서 선 굵게 문제를 푸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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