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 ⑪]「國監 부조리」 판치는 로비

  • 입력 1997년 5월 12일 20시 16분


이번 한보사태의 와중에서 국회 국정감사의 「치부(恥部)」가 다시한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고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려 아직 사실관계는 판명되지 않았지만 한보사건으로 구속된 신한국당의 鄭在哲(정재철)의원과 국민회의의 權魯甲(권노갑)의원의 영장에는 국감과 여야 중진들과 기업들이 어떤 커넥션으로 얽혀 있는지의 일단을 보여준다. 『국정감사와 관련, 국민회의 의원들이 한보의 여신 및 담보현황 등에 대한 자료제출을 요구하자 정의원은 96년 10월초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총회장의 부탁을 받고 권의원에게 이들의 국감질의를 무마해 달라며 1억원을 전달했다』 丁世均(정세균·국민회의)의원은 「돈의 유혹」을 이겨낸 경우로 꼽혔지만 국감과 관련한 기업측의 로비실태가 가감없이 드러났다. 15대 국회 첫 국감이 한창 진행중이던 지난해 10월5일 李龍男(이용남)한보철강사장은 대학후배인 정의원(국회재정경제위소속)이 한보 여신현황 자료를 요청한 사실을 알고 그를 서울 P호텔로 불러냈다. 이사장은 『잘 부탁한다』며 현금 1천만원이 든 돈가방을 건네주려 했으나 정의원은 이를 뿌리쳤다는 것. 국감 시작 한달전부터 2개월가량 여의도 국회내 의원회관은 정부 각부처와 기업, 각종 공사와 단체 관계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로비열풍」에 휩싸인다. 학연 지연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되고 사안에 따라 크고 작은 「금품」과 「뒷거래」가 난무한다. 일부 의원들은 농반진반으로 『이런 맛에 금배지 단다』고 실토할 정도다. 정해진 국감기간내에 도저히 정상적인 감사를 할 수 없는데도 의원들이 엄청나게 피감기관을 많이 선정하는 이유도 「염불」보다 「잿밥」에 있다는 게 이미오래된정치권의정설이다. 지난해 국감의 경우에도 △국감대상기관수 3백40개 △요구자료건수 3만3천9백57건 △증인 및 참고인수 2천5백38명등 누가 봐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로비 행태도 「초보」부터 「고단위」까지 천차만별이다. 자료요구 단계에서 피감기관의 국회 연락관이나 대기업 정보팀이 의원들의 준비상황을 파악해내는 것은 초보에 속한다. 이같은 로비는 어떻게 보면 사람사는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금품거래」나 「지역구사업 청탁」 등 이른바 「대가(代價)」가 오가는 악성로비다. 물론 이런 수준의 로비행태는 완전히 베일 뒤에 가려져 있다. 다만 그동안 「사건화」됐던 몇몇 경우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실체가 드러났을 뿐이다. 첫번째는 의원측에서 먼저 자료를 요구하거나 폭로위협을 해 거액의 금품을 뜯어내는 수법.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95년말 공갈과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朴恩台(박은태·당시 민주당·국회재경위)전의원의 경우다. 박의원은 지난 93년 국감 시작 한달전 S은행 상무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내가 가지고 있는 비리 자료를 터뜨리면 당신네 은행은 끝장이다. 입을 다물테니 당신 은행에서 내 채무에 대한 연대보증 면제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 20억원의 채무보증을 면제받았다. 반대로 「뒤가 구린」 피감기관이나 대기업 등이 의원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에 드러난 한보의 경우가 국감 로비 메커니즘의 「전형(典型)」. 「의원들의 자료요구 정보입수→한보측에 연락→한보의 의원로비」식의 메커니즘에 말려들었다가 결국 청문회에까지 섰던 朴錫台(박석태)전제일은행상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사건까지 불렀다. 또다른 로비행태는 「지역구 사업챙기기」. 이 또한 「누이좋고 매부좋은」 경우라 확실한 사례를 잡기 어렵지만 국회 주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회 건설교통위소속 한 야당의원의 보좌관은 『해당부처에 결정적 타격을 미칠 건수가 있는 경우 부처의 고위 간부들이 직접 나서 질의 자체를 무마하거나 수위를 낮추는 조건으로 해당의원의 지역구사업에 예산을 좀더 배정하거나 숙원사업 등 민원을 들어주는 경우가 비일비재 다』고 털어놓았다. 증인이나 참고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은밀한 거래가 오간다는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설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의원 개인차원이 아니라 당지도부가 개입하는 경우다. 한 전직의원은 『당지도부가 특정업체를 지목하면서 「좀 건드리라」고 주문했다가 막상 문제를 삼으려 하면 「이제 그만두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한다』며 의혹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한보사건을 계기로 정치권 일각에서 『국감이 이제는 국정에 대한 감시 기능보다는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창구 기능으로 애용되는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국감이 지니는 민주의정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무용론」 「폐지론」이 제기되고 있다. 〈정용관 기자〉 ▼ 선진국에선… ▼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후보였던 보브 돌의 딸 로빈 돌은 부동산회사 「센트리21」의 수석로비스트로 활약중이다. 아버지가 막강한 정치인이고 딸이 아버지의 동료 정치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펼치는 「특이한 부녀관계」인 셈이다. 「로비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이같은 사례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로비활동이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2만5천여명의 로비스트가 활동중이다. 상하원 의원수는 모두 5백35명. 정치적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비중이 다르지만 산술적으로는 의원 1인당 40여명의 로비스트가 달라붙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처럼 거액이 오가는 음성적인 「뒷거래」는 법적으로 철저히 차단된다. 특히 지난 95년 상원에서 로비활동 규제법안을 마련, 로비활동에 대한 법적 규제장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 법안은 공직자들의 경우 퇴임후 5년간은 로비스트로 활약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또 50달러 이상의 선물기부를 금지하고 로비를 의뢰할 경우 의뢰인의 신원 및 수수료 명세까지 공개토록 했다. 뿐만 아니다. 로비단체인 「정치활동위원회(PAC)」에 대해 「돈과 정치를 생각하는 전국클럽」 「책임정치를 위한 시민모임」 등 시민단체들이 항상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영국도 의회에서의 로비활동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그러나 「인민대표법」 등 법적 제재 외에 시민들의 감시가 부정의 소지를 사전에 막고 있다. 1천명이 넘는 로비스트가 활동하는 일본은 우리처럼 「검은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통제제도로는 1만엔 이상의 기부자 명단을 반드시 기록에 남기도록 한 「정치자금규정법」 정도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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