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포장제로 마켓의 적당한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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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11월 18일 1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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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의 TREND INSIGHT

더 필러리(The Fillery)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슈퍼마켓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있는 여느 슈퍼마켓과는 다르다. 이곳엔 비닐 랩이나 하얀 스티로폼 등 플라스틱 포장재로 소포장된 물건이 없다. 개별 포장을 하지 않은 식재료가 각기 큰 통에 담겨져 있고 이걸 소비자가 자신이 가져온 용기에 원하는 만큼 무게 단위로 계산하고 사갈 수 있다.

직원이 포장을 직접 해주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물건을 사려면 직접 포장용기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제공하는 재활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야 한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화려하고 깔끔한 진열대에 포장된 물건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담아서 오던 장보기에 익숙한 이들에겐 불편하고 꺼려지는 공간이다. 이곳은 포장 제로 마켓이다. 올해 3월 킥스타터에서 모금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388명의 지지자와 1만7075 달러의 후원금을 모았고 4월 브루클린에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불편한 슈퍼마켓을 지지하고 후원금을 보내는 이유는 뭘까.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위하자는 것과 함께, 이런 사업 아이디어가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소매를 위해 도매로 산 물건을 나누는 작업을 하다 보면 포장은 필수적이다. 플라스틱 용기도 쓰게 되고 사람의 노동도 들어간다. 이런 걸 썼던 건 소비자의 편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편리함을 포기했더니 환경오염도 줄고 비용도 절감되어 가격 인하의 요인이 된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하자 오히려 사회적 이익과 소비자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이 생긴 셈이다.

더 필러리의 슬로건은 ‘Goods for your pantry. Good for the planet’이다. 슈퍼마켓의 슬로건이 꽤 거창한 듯하지만, 이것이 이들의 정체성이자 이곳을 다른 마켓과 차별화하는 포인트다. 친환경이 슈퍼마켓의 기준이 되고, 경쟁력이 되는 시대를 맞았다. 나에게만 좋은 물건에서, 세상을 위해 좋은 물건으로 일상 소비재의 방향도 바뀔 수 있다. 이건 단지 슈퍼마켓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이자, 우리가 가진 소비와 기업,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더 필러리는 베를린에서 시작된 오리지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 : ‘포장되어 있지 않은’이란 뜻)라는,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을 지속가능하게 보호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슈퍼마켓 프로젝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곳도 독일의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수많은 이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 오픈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쓰레기를 줄이는 슈퍼마켓의 롤 모델이 됐다. 벨기에에도 제로 웨이스트 숍(The Zero waste Shop)이 있고, 네덜란드에도 포장이 없는 슈퍼마켓들이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흐름이 미국까지 건너간 셈인데, 한국에서도 충분히 시작될 수 있다.

애초에 물건을 포장해서 팔지 않고, 아주 소량도 무게를 재서 팔 수 있다 보니 친환경과 무관하게 1인 가구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슈퍼마켓이기도 하다. 분명 2017년 서울에서도 이런 마켓이 속속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친환경은 양보할 수 없는, 그리고 더는 미룰 수 없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일상 소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접근 중 하나인 포장 제로 마켓은 적당한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충분히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비즈니스다.

트렌드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흘러가야할 방향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라면 흐름은 만들어진다. 포장제로 마켓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보자. 그 흐름을 만들어보자. 트렌드는 결국 사람들의 지지와 동참을 통해서 거센 물결이 되는 것이니까.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민텔(Mintel)의 ‘2016년 미국 식품포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식품 소비자 중 80%가 음식물 쓰레기 줄이는 것 못지않게 식품포장 폐기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포장을 최소한으로 하거나 포장을 전혀 하지 않은 노패키징 식품을 선호한다는 응답자가 52%였다. 개봉 후 다시 봉합할 수 있는 개폐식 식품포장을 개폐식이 불가능한 식품포장에 비해 선호한다는 소비자가 81%나 됐고, 소비자들은 개폐식 또는 용량조절 등이 가능한 식품포장일 경우 가격이 더 높더라도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의향이 있다는 소비자가 54%였다.

우리도 포장 제로를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 막걸리를 사러가려면 주전자를 가져가야 했고, 두부를 사러갈 때도 그릇을 가져가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플라스틱이 일상 깊숙이 들어오면서 하얀색 스티로폼 위에 담긴 음식을 투명한 비닐 랩으로 싸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 보고 와서 집에서 냉장고에 음식을 넣다보면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나 쓰레기들이 잔뜩 나오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시대에도 테이크아웃 일회용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가져가서 커피를 사오는 사람들이 있다. 텀블러를 쓰면 일회용품을 덜 쓰게 되는 만큼 할인을 해주는데, 사실 돈을 아끼겠다는 것보단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음식쓰레기도 엄청나게 많지만, 음식을 둘러싼 쓰레기가 너무 많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포장 제로 마켓이다. 편리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동안 누린 편리를 조금 양보하고 적당한 불편함으로 돌아가는 걸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필러리#슈퍼마켓#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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