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용히 흐르던 ‘나’의 삶에 불현듯 나타난 ‘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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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믜리도 괴리도 업시/성석제 지음/284쪽·1만2000원·문학동네

 2인칭 ‘너’를 주인공으로 삼은 한국 소설 중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첫사랑’일 것이다. ‘너’와 ‘나’ 두 중학생 소년의 동성애를 그린 이 소설은 신인 작가 성석제 씨를 문단에 자리 굳히게 하면서 ‘한국 퀴어소설의 캐논’으로 불리는 작품이 됐다.

 성석제 씨의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의 표제작의 첫 장을 읽으면 딱, 감이 온다. ‘첫사랑’의 후속편이구나. ‘너에게서 전화가 온 건 꼭 오 년 만이었다’는 첫 문장부터 그렇다. 유년시절의 ‘너’는 부친의 도산으로 한순간에 귀공자에서 ‘만인의 똥개’로 전락했다. 전학 온 뒤 만난 ‘너’가 “늘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하자 ‘나’는 “징그럽게 왜 이래”라고 몰아치면서도 야릇한 관심을 내치지 않는다. 중년의 ‘너’는 금발의 동성 애인을 둔 재불 화가가 돼서 나타나고, 묘한 질투를 느끼는 ‘나’에게 매몰차게 한마디 한다. “나도 눈이 있고 수준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내 취향이 아니야.” 첫사랑의 순정을 애틋하게 묘사했던 작가는, 그 무렵의 소년들을 성장시켜 세상 풍파에 시달리게 하고는 중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특유의 입담 또한 적나라할 정도로 드러남은 물론이다.

 ‘블랙박스’에도 ‘너’가 등장한다. 글쓰기가 막힌 소설가 화자와 동명이인인 ‘너’는 쓰다 만 화자의 소설을 마무리해 주고, 화자를 대신해 소설을 써준다. 창작을 배운 적도 없는 ‘너’가 쓰는 소설은 서투른 듯하지만 감동이 엄청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너’가 진짜 대필자인지, ‘나’의 소설 속 인물인지 의문이 생긴다. 중견 소설가의 창작의 고뇌도 소설로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능력이 여간 아니다.

 스마트폰 중독을 다룬 ‘나는 너다’, 납북어부 간첩 사건을 소재로 삼은 ‘매달리다’ 등에선 사회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지한 서사에 도전하는 성 씨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 소설들에서도 성 씨의 입말은 여전히 유려하다. 평론가 노태훈 씨가 ‘듣는 소설’이라고 했는데(밥 딜런 노래를 ‘듣는 시’로 일컫기 전에 쓰인 평론이다) 절묘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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