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세계는 리콴유를 그리워하게 될 것”…WP에 추도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4일 1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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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대한 글로벌 전략가이자 정치 사상가였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와 오랜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다.”

‘서방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92)은 동갑내기 친구였던 ‘동방의 거목’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 소식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24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장문의 추도사(제목 ‘세계는 리콴유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The world will miss Lee Kuan Yew)’에는 50년 가까이 쌓은 두 사람의 우정이 묻어난다.

1970년대 중국을 상대로 ‘핑퐁외교’를 펼쳐 ‘죽의 장막’을 걷어낸 키신저 전 장관은 리 전 총리를 싱가포르의 국부뿐만 아니라 미중 간 역학 관계와 글로벌 질서의 핵심을 꿰뚫은 국제 정치의 멘토로 기억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뒤 초대 총리에 취임한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이 교수로 재임하던 미 하버드대를 찾아갔다. 미국 주도의 베트남전을 비판하던 교수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를 놓고 토론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 등 교수들에게 “당신들 말을 듣자니 역겹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국이 하나로 강하게 뭉쳐야 싱가포르의 독립과 번영이 가능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나와 비슷하게) 리 전 총리는 그때부터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하고 있었다”며 인상적인 첫 만남을 회고했다.

두 사람은 그 후 최근까지 각종 국제회의 등에서 수백 차례 만나 각종 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중국의 부상과 아시아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오래 전부터 교감했다고 키신저 전 장관은 밝혔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국제자문단 창립회의에선 동료 자문위원으로 만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당시 회의에서 “한국이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 안에서 나름의 아시아적 가치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 등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리 전 총리의 이 같은 혜안 때문에 역대 미 대통령들은 앞 다퉈 그를 워싱턴에 모셔 ‘한 수’ 배우려 했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10월 그를 백악관에 초대해 아시아 정책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2010년 ‘아시아 회귀 정책’을 발표했다.
일각에서 리 전 총리의 리더십을 권위주의라고 비판하는 데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그는 오로지 책임 있는 리더십을 갈망한 ‘청교도’적인 사람이었다”며 일축했다.

“위대한 지도자는 종종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심지어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곳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끌기도 한다. 때때로 기존의 지혜를 거부하기도 한다. 리콴유는 좋은 교육, 부패 척결, 성과주의라는 수단으로 오늘의 싱가포르를 만들어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타계한 리 전 총리를 향해 “내가 아는 그는 감성적인 표현에는 서툴렀지만 싱가포르의 번영이라는 믿음을 갖고 항상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했다”며 “우리는 리콴유로부터 많이 듣고 배웠으며 앞으로도 그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추도사를 마무리했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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