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손택균의 카덴차> I Still Wish: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8일 11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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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속초 대포항 좌판 앞에 서서 새우튀김을 사먹다 들었던 말.
"서울깍쟁이."
서비스로 하나만 더 주세요-에 대한 반응이었나. 칭찬은 아니었다.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지만 다섯 살 때부터 서울 떠난 적이 없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가 마치 지고의 선(善)인 듯 여겨진다. 한창 절정으로 불타오른 유행마냥. 하지만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것 뒤에는 어렴풋 냄새만 남은 시간의 조각이 늘 무지막지 쌓여 있다. 유흥업소로 빽빽한 지금의 그 동네 한복판에 분명 엄지손가락만한 청개구리가 버글버글했던 갈대밭 웅덩이, 방아깨비 천지의 시퍼런 수풀이- 진짜로, 있었다.
판박이 운동기구와 조깅 트랙으로 주물 뜨듯 흉측하게 정리되기 전.

이야기 밀도는 높지 않다. 느릿느릿. 듬성듬성.
경제적 사정(을 빙자한 어떤 복잡다단한 사정)으로 후쿠오카와 가고시마에 떨어져 살기 시작한 아빠와 엄마. 한 명씩 그들을 따라가 덩달아 떨어져 살게 된 열세 살 코이치와 열한 살 류노스케 형제의 사연이다.

아버지 역은 오다기리 조. 최근 개봉한 대작 한국영화 ‘마이 웨이’에서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멋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에 대해 “스크린 밖에 있을 때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아버지 역은 오다기리 조. 최근 개봉한 대작 한국영화 ‘마이 웨이’에서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멋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에 대해 “스크린 밖에 있을 때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마주 달리는 두 대의 신칸센이 교차하는 순간 그곳에 서서 소원을 외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일단의 소년소녀들이 진짜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는 듯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열심히 실천에 옮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처음 봤을 때 중반부 20여 분을 잠들어 놓쳤다. 전날 밤새 뜬눈으로 뒤척이느라 피곤했나. 찝찝한 마음에 다음날 다시 극장을 찾았다. 다른 부분에서 다시 잠들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도록 하려고 온갖 공을 들이는 요즘의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표 값이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이런, 또 잠들어서 몇 장면 놓쳤네. 그런 아쉬움만 잠깐. 아지랑이 나울거리는 창가 마른자리에 낮잠 재우려 누인 아가의 재롱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깜박 같이 잠들어버린, 그런 느낌.

"일본에는 전통적인 신(神)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나는) 때때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그렇게 함으로써 심상(心想)을 정화하는 것이죠."

지난달 만났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
작별하고 한참 만에 영화를 보다가 새삼 그 말이 곱씹어졌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즐겁게 웃으며 타코야키를 먹는- 막내 류노스케의 ‘꿈’. 진짜로 그런 저녁이 있었는지, 그저 간절한 공상일 뿐인지. 모호하게 처리했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즐겁게 웃으며 타코야키를 먹는- 막내 류노스케의 ‘꿈’. 진짜로 그런 저녁이 있었는지, 그저 간절한 공상일 뿐인지. 모호하게 처리했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영어 제목은 'I Wish'.
무언가를 소망하고 바란다는 건 꼬마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일까.
그럴 리가.

이화여대 정문에 굴다리가 있던 때. '함께 걷다 열차 꼬리를 밟으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바보천치멍텅구리 같은 이야기 때문에 걷는 속도를 슬그머니 티 안 내는 척 늦추면서 주머니에 넣은 손을 더 꼭 쥐곤 했다.

'별똥별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면 이루어진다'던 사탕발림.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고 그저 재미로"-라고 전화로는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영화 말미 점멸하는 플래시백과 개인적 플래시백이 카드 섞듯 교차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적.
수없이 다시 지났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던 동네 물웅덩이 흙냄새. 가슴 사무치게 고마웠다.

칸 영화제를 웅성거리게 했던 '아무도 모른다'의 세련된 절망 같은 것. 없다.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교차하는 고속열차 따위가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는 것. 소년들도 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소망한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교차하는 고속열차 따위가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는 것. 소년들도 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소망한다. 사진 제공 미로비젼

비평가라면 혹시 가늠하기 힘든 시간적 배경, 마냥 착하고 아름답기만 한 비현실적 어린이 캐릭터, 낙관적이지만 패배적일 수도 있는 현실순응, 일상의 자잘한 기적을 나열하는 낭만적이지만 촌스러운 직설 등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도 모른다'보다 그 뒤 내놓은 '하나', '걸어도 걸어도'를 좋아했던 관객으로서는 넉넉히 만족.

깜박 졸다 깼는데도 극장 출구를 나서며 어쩐지 모르게 만족스러워지는, 나른하지만 게으르지 않은 기묘한 입담. 여전하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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