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성호]선거공약 쉽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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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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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상황이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들수록 말을 아끼게 마련이다. 장차 무엇을 하겠다고 딱 부러지게 약속하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이 자명한 이치가 한국정치에선 예외인가 보다. 시대는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데 정치인들은 한쪽으로의 선거 공약을 자신만만하게 남발한다. 불확실성 시대에 호언장담형 한국정치가 보여주는 패러독스다. 상황이 날로 바뀌는 속에서 몇 년 후 선거 공약을 원래대로 강행하려 할 때 현실의 저항을 받고 적실성의 상실을 겪기 쉽다. 한국정치가 심한 갈등을 낳고 불신을 받는 한 원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처럼 선거 공약으로 홍역을 앓은 경우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운하, 4대강, 세종시, 신공항, 과학벨트 등 대선 과정에서 호언했던 공약으로 인해 거센 정치격랑에 빠지고 국정 마비, 리더십 위기를 경험했다. 최근엔 반값 대학등록금, 의약품 슈퍼마켓 판매 등 대선 당시엔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사안에서마저 후보 시절 발언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언제 무슨 쟁점에서 과거 선거 때의 공약이나 발언이 불거져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지 아슬아슬하다.

오늘날 시대 환경에서 선거 공약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 선거와 국정 운영이 지역감정이나 권력욕에 좌우되지 않고 합리적 정책 대결로 가게 도와준다. 다른 한편으로 선거 후 국정운영을 경직되게 만들고 시대상황에 그때그때 적응하지 못하게 하며 대립과 교착의 악순환을 초래하곤 한다. 후기산업시대를 맞아 요즘 사회는 파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졌고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사회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적응하기 힘들고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줄 정도다. 과거에도 예측이 쉬웠을 리 없지만 오늘날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사회의 가변성이 크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 상황에 부합하려면 선거 공약이 특정 방향으로 너무 확정적인 입장을 취해선 곤란하다. 국가의 전반적 발전 방향, 거시적 비전, 국정 철학과 가치 등 종합적 전체적 장기적 의제를 일반론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선거 후 국정 과정상 숙의(熟議)를 거쳐 완제품으로 가공할 수 있을 만한 재료가 돼야 한다. 선거 공약이 국정 과정상 대화와 소통을 위한 의제 혹은 예비적 잠정적 입장의 표명을 넘어 확고한 입장을 널리 선포하는 것이 되면 일방적 주장 간 양보 없는 대치국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숨차게 바뀌는 현실 속에서 적실성을 잃어 결국 허언이 될 수밖에 없다.

선거 공약에 대한 유연한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당락을 결정짓는 수많은 요인 중 특정 구체적 정책 현안에 대한 후보의 입장은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당선자가 내건 모든 공약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오히려 사안별로 민심을 역행할 수 있어 다수의 횡포뿐 아니라 소수의 억지가 국정을 해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또 선거 공약이 확정적이라면 국정 과정상 소통이 왜 필요하겠는가. 물론 선거 공약 없이 후보의 출신지나 면면만 보고 집단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려 투표하던 과거로 퇴행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거 공약을 구체적 입장의 절대적 선언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4월 총선, 12월 대선을 앞두고 온갖 장밋빛 공약의 성찬이 예상된다. 정치인들은 현 정부와 정치권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말을 좀 무겁게 하면 좋겠다. 확정적 정책 약속을 양산하고 여기에 경직되게 매달릴 경우 중장기적으로 소통이 실종되고 국정을 망칠 뿐 아니라 단기적으로 유권자에게 어필하기도 어렵다. 각종 허언에 실망해 불신에 빠진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의 장사꾼 같은 약속에 마음을 줄 것 같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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