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여기는 배우로서의 내 뼈가 자란 곳이야”

  • 입력 2009년 4월 16일 02시 58분


34년 만에 문을 여는 명동예술극장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배우 장민호 씨. 그는 재개관 기념작 ‘맹진사댁 경사’에서 맹진사역을 맡아 이 무대에 돌아온다. 이훈구 기자
34년 만에 문을 여는 명동예술극장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배우 장민호 씨. 그는 재개관 기념작 ‘맹진사댁 경사’에서 맹진사역을 맡아 이 무대에 돌아온다. 이훈구 기자
《서울 중구 명동 1가 54번지.

옛 국립극장이던 명동예술극장(극장장 구자흥)이 6월 5일 다시 문을 연다. 1975년 11월 대한투자금융에 팔린지 34년 만의 일이다.

개관 기념작으로는 6월 5∼21일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이병훈 연출)가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에서 주연 맹노인 역을 맡은 배우 장민호 씨(85)는 유치진 이해랑 김동원 최은희 신구 씨 등과 이곳에서 젊음을 보낸 연극계의 산증인.

14일 오후 장 씨와 함께 개관을 앞둔 명동예술극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장 씨는 “36년 만에 이 무대에 서는데 감개무량”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34년만에 다시 문여는 명동예술극장 배우 장민호 씨와 둘러보니

6월 5∼21일 개관기념작 ‘맹진사댁 경사’ 서 맹노인역 맡아

객석 규모 552석으로 예전보다 줄어 “파도 칠 날 많겠구만”

“꿈이야 생시야.”

장 씨가 명동예술극장 로비에 들어섰다. 매표소가 있던 자리였다. 후배 배우 서희승 씨(57)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한 걸음씩 떼던 그는 극장 주변의 건물들을 분주히 훑었다. “여기가 한일관(설렁탕집) 자리였고 바로 옆이 상업은행, 또 그 옆이 일번지 다방이었지. 주인 여자가 배우 뺨치게 예뻐 사람들이 끊이질 않던 그 사랑방.”

장 씨는 “배우로서의 내 뼈가 자란 곳”이라고 말했다. 1950년부터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옮긴 1973년까지 이 극장의 무대에 섰다. 장 씨가 기억하는 첫 무대는 1950년 4월 극단 청막극회에서 올린 ‘마리우스’. 얼마 뒤 6·25가 터져 피란을 갔으며 1956년 ‘신앙과 고향’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섰다.

명동예술극장은 1934년 영화관 ‘명치좌(明治座)’로 시작해 광복 이후 1961년까지 ‘서울시공관(市公館)’, 1973년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생기기 전까지 ‘국립극장’으로 불렸다. 이후 2년간 예술극장으로 불리다가 1975년 대한투자금융에 팔렸다. 명동예술극장의 부활은 1994년 명동상가번영회와 연극인들이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을 벌인 데서 비롯됐으며 2004년 정부가 매입한 뒤 630억 원을 들여 복원했다.

장 씨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막바지 무대 공사가 한창이었다. 1934년 바로크 양식의 외벽은 그대로 복원했으나 내부 시설은 크게 바뀌었다. 건물 2∼4층에는 552석의 중극장이, 5층에는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명치좌(1178석)나 옛 국립극장(820석) 시절과 비교하면 객석도 크게 줄었다.

장 씨는 “객석이 줄었으니 파도 칠 날이 많겠구먼”이라고 말했다. ‘파도치다’는 말은 1960,70년대 매진을 뜻하는 은어. “그때는 좌석에 번호가 없어 선착순으로 앉았죠. 좌석에 못 앉으면 다들 서서 보는 거야. 매진이 되면 좌석에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이 밀고 당기는 게 영락없이 파도였어. 공연 전 감독이 ‘파도는 치냐’ 물어보면 무대감독이 ‘네, 엄청 납니다’라고 답했다우.”

무대는 폭 12m, 깊이 10m, 높이 7m로 널찍했다. 객석에서 무대가 잘 볼 수 있도록 했고, 말발굽형 모양으로 조성된 객석과 무대의 거리도 짧았다. 장 씨는 “관객을 품기 딱 좋은 무대”라고 말했다.

“배우는 무대 중간에 섰을 때 관객이 품 안에 들어와야 해. 그래야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관객이 알아듣지. 그 에너지가 생겨야 관객을 압도할 수 있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야.”

그는 객석 뒤를 훑어보더니 2층의 한 곳을 가리켰다. 감시관들이 앉아 공연을 감시하던 ‘임검(관)석’이다. 당시에는 그 자리가 임금 같다고 해서 임금석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음향실이 자리잡고 있다. 음향시설을 둘러보던 장 씨는 공연 시작 전 징을 치던 풍습도 떠올렸다. “‘띠리링’ 하는 초인종이 울리면 객석이 조용해지고 무대감독이 ‘둥둥둥둥둥둥 꽝’ 하는 징을 치면 객석불이 꺼졌어. 더 크게 ‘꽝’이 울리면 막이 올라가고 그 다음 ‘꽝’에서는 불이 꺼지며 공연이 시작됐지.” 이제 징소리는 사라졌지만 막(幕)은 예전과 다를 것 없는 자주색 주름막이다. 무대 바로 아래까지 온 장 씨는 두 달 뒤 무대에 선다는 생각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그 시절 선배, 동료 한 사람도 없어. 다 돌아가셨어. 얼마 후면 이곳에 올라가는데 아무래도 그 생각에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다는 거요. (한숨) 난 살아서 이렇게 나불대니 좀 나은 건가. 개관 작품에 단역도 아니고 주연을 맡았으니.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어. 허허.”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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