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비밀 가득한 편지가 신비 가득한 소설로

  • 입력 2008년 12월 20일 02시 59분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메리 앤 셰퍼, 애니 배로우즈 지음·김안나 옮김/496쪽·1만2800원·매직하우스

30대 여성 작가 줄리엣은 요즘 기분이 나쁘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달 지났을 무렵이어서 전쟁의 상처가 말끔히 지워지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의 반응이 괜찮았다. 강연회와 낭독회에 초대받으며 좀 더 진지한 작품을 쓰고픈 기운이 솟구쳤다.

그때 마침 날아온 한 통의 편지. 영국 땅이지만 프랑스에 더 가까운 외딴섬 ‘건지 아일랜드’에 사는 주민이었다. 자신을 문학회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소속이라고 밝힌 애덤스. 그런데 돼지구이 만찬에서 시작됐다는 이 묘한 이름의 문학회에 줄리엣은 마음을 뺏기기 시작한다.

문학회의 출발은 이랬다. 독일군 점령 아래 놓였던 건지 섬. 어느 날, 주민들은 다 뺏기고 하나 남은 돼지를 잡아 몰래 나눠 먹는다.

오랜만의 파티로 늦게 귀가하다 독일군 통행금지에 걸려 급한 마음에 독일 책을 거론하며 있지도 않은 문학회 핑계를 댔는데…. 이를 들은 독일군 순찰대장이 다음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통보를 전해온다.

‘건지 아일랜드…’는 신비한 책이다. 소설 형식이 모두 편지다. 줄리엣을 둘러싸고 여럿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서간집 꼴이다. 다락방에서 먼지가 쌓인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는 느낌. 옛 지인의 비밀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다.

아쉬운 점은 이 소설이 저자인 셰퍼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하며 살아온 작가는 칠십 평생의 꿈이 출간되는 것도 못 보고 올해 초 세상을 떠났다.

책은 조카인 배로우즈가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 유재하가 남긴, 단 한 장의 앨범을 듣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놀랍도록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글이 차가워진 세밑의 가슴팍을 후후 불어 녹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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