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1년 美수뇌부 日기습 우려 전달

  • 입력 2008년 11월 25일 03시 00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의 기습공격을 매우 분명한 가능성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 해군작전사령관 해럴드 스타크 제독은 1941년 11월 25일 하와이 진주만의 허즈번드 키멜 태평양함대사령관에게 수뇌부의 우려를 전했다. 다음 달 7일 일본 함대의 진주만 공격을 1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같은 날 내각에서 “우리는 다음 주 초 일본의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일본은 경고 없이 공격하기로 악명이 높다”고 경각심을 촉구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게도 전보를 보내 “우리 모두 가능한 한 빨리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기습에 대한 정보는 미 정보기관의 암호 해독 능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정보기관은 일본의 외교메시지를 해독해 11월 25일이 매우 중요한 날짜임을 알아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가 훈령을 내려 외교 협상을 이날까지 결말지으라고 못 박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렵 일본군은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본 주력 함정들이 모항을 떠나 11월 17일 북방의 외진 쿠릴 열도의 한 정박지에 모여들었고 개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뇌부의 사전 경보에도 불구하고 진주만의 미군은 무방비 상태였고, 일본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는 훗날 미국 수뇌부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일본의 공격을 방치 또는 유인했다는 온갖 음모론의 빌미가 됐다.

하지만 이후 10차례 실시된 정부와 의회 차원의 공식조사 결과 미국이 기습계획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국 수뇌부는 일본군의 기습 목표가 필리핀이나 동남아일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나아가 육군, 해군, 연방수사국 등 여러 정보기관이 난립하다 보니 업무 중복과 상호 경쟁 탓에 일선에서는 상호 모순되거나 신뢰도를 가늠할 수 없는 정보들로 혼란을 겪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어쨌든 미국 정보기관 역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꼽히는 진주만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잡다한 정보기관들의 조직을 통합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중앙정보국(CIA)이 설립된 것에도 진주만의 악몽을 떨쳐버리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치욕은 진주만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에선 정보 실패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미 정보기관들은 일대 수술을 감수해야 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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