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잘하던 선수가 헤매면…

  • 입력 2007년 11월 30일 02시 59분


코멘트
《“투수의 제구력이라는 게 머릿속으로 그린 이미지를 따라가느냐, 못 따라가느냐 하는 문제 아닌가? 오히려 영감(靈感)에 가까운 거 아닐까?

하지만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질 않아.

그러니까 일단 톱니바퀴가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고치기가 어렵지….

투구 폼은 완벽한데 제구력 난조를 보이는 투수도 있잖아.

그런가 하면 아무렇게나 던져도 훌륭하게 코너에 꽂는 투수도 있고.

야구를 한 게 20년은 거뜬히 넘었을 거 아냐?

머리는 한순간 잊는다 해도 몸은 확실히 기억하니까 걱정마라.

너는 머리가 앞서서 몸 움직임을 가로막는 거라고.”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에서>》

갑자기 스트라이크 못 던지는 투수… 50cm 거리의 퍼트 못 넣는 골퍼

‘징크스’일까요?… ‘입스’일까요?

군대 제식훈련 때 오른발과 오른손이 동시에 올라가는 사람이 꼭 한두 명씩은 있다. 교관은 그들을 따로 불러내 고쳐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훈련병들의 행진 자세는 엉망이 된다. 왼팔과 왼발이 동시에 올라가고, 오른팔과 오른발이 또 같이 올라간다. 왜 그럴까? 그들은 평상시 걸을 땐 아무 이상이 없다.

그렇다. 수십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잘해 오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고, 두려워’진다. 뭔가 자꾸 뒤가 켕기고 피하고 싶어진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그 어느 종목이든 그 기술을 완전히 익히는 데 최소 10년은 걸린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세 살 때부터 훈련을 시작했고 여섯 살 때 토너먼트 경기에 출전했다. 15세 무렵엔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토너먼트 출전에서부터 첫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10년 정도가 걸렸다.

그렇다면 세계 1인자가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그것은 기술을 완전히 익힌 뒤 10년은 돼야 한다. 마이클 조든은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유망주에서부터 1991년 시카고 불스에서 NBA를 우승할 때까지 10년이 걸렸다. 결국 운동을 시작해 20년쯤 돼야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다. 우즈는 21세 때 세계랭킹 1위가 됐는데 세 살 이후 19년 만이었다. 베이브 루스 19년(7세 시작∼26세 홈런왕), 펠레 20년(5세 첫 경기∼25세 최고 선수), 랜스 암스트롱 18년(10세 첫 우승∼28세 투르 드 프랑스 우승) 등도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세계 최고 스포츠 스타들은 평균 8세 때 운동을 시작해 17세 무렵 기술을 완성한 뒤 25세쯤 세계 최고가 된다’고 말한다.

○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안 움직이는 데서 유래

기술을 완전히 익히면 이젠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생각이 개입되면 근육에 익혀 놓은 기술이 자꾸 흐트러진다. 강을 다 건너면 배(생각)를 버려야 하는 것과 똑같다.

스포츠 스타 중에선 훈련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의식과잉이 근육에 저장된 무의식 본능과 부딪치기 때문이다. 생각이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너무 많이 노력하면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결과를 부르게 된다.

입스(YIPS)라는 게 있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데서 유래했다. 어제까지 연주하는 데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돌연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X레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등 온갖 검사를 다 해봐도 이상을 발견할 수가 없다.

골프의 ‘퍼트 입스’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프로골퍼가 홀 50cm 앞까지 바짝 붙이는 데 성공했는데도, 그 다음 퍼트가 안 된다. 잘나가던 프로골퍼 중엔 이 망할 놈의 퍼트 입스 때문에 꿈을 접은 사람도 있다.

야구에선 이를 흔히 ‘스티브 블래스 병(病)’이라고 부른다. 스티브 블래스 병이란 ‘잘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고 헤매는’ 것을 말한다. 스티브 블래스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피츠버그 파이리츠 투수였다. 1968년 18승부터 1972년 19승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8년 통산 100승)를 기록한 대단한 투수였다. 하지만 그는 1973년 시즌(3승 9패·평균자책 9.85)부터 갑자기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1974년 한 경기에 등판해 5이닝 동안 7개 볼넷을 내주며 8실점한 뒤 32세 나이로 은퇴하고 말았다.

척 노블럭이라는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2루수도 스티브 블래스 병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노블럭은 1991년 미네소타에서 데뷔해 공격 수비 주루 삼박자를 갖춘 최고의 2루수로 각광 받았다. 뉴욕 양키스가 1998년 큰돈을 들여 그를 모셔 갔다. 하지만 그는 2000시즌부터 평범한 2루 땅볼도 상대 더그아웃이나 관중석으로 던져 댔다. 그는 결국 2002년 33세 나이로 옷을 벗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기아 강속구 투수 김진우가 팬들로부터 ‘입스’ 의심을 받았다. 결국 그는 올 시즌 ‘임의탈퇴’로 야구판을 떠났다. A구단 B 투수도 1루 견제만 했다 하면 어림없는 볼을 던져 대 ‘입스’ 증상을 보이고 있다.

○ 차범근 감독 분데스리가 시절 한 번도 페널티킥 안 찼다

축구에선 페널티킥을 못 차는 선수가 의외로 많다. 보통 징크스로 얼버무리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것도 입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차범근 감독도 현역 시절에 페널티킥을 차라면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차 감독이 넣은 골은 모두 98골. 놀랍게도 이 98골 모두 필드골이다. 단 한 골도 페널티킥으로 얻은 골이 없다. 차 감독은 자신이 얻은 페널티킥조차 단 한 번도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은 늘 근육에 저장된다. 근육은 하드디스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근육은 수천수만 번 되풀이해서 가르쳐 줘야 비로소 기억한다. 운동기술을 처음 익힐 때는 왼쪽 뇌가 작용한다. 왼쪽 뇌는 동작을 이해하고 분석한 뒤 근육에 알게 모르게 그 기억을 저장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피나는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이때 기본기를 잘못 배우면 큰일 난다. 나중에 고치려면 몇 배나 더 힘들다. 더디 가더라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근육은 한번 기억하면 평생 잊지 않는다.

최고 스타들은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할 수 있을 때’까지 운동기술을 몸에 익힌다. 그들은 ‘무의식 본능’으로 플레이를 펼친다. 오른쪽 뇌를 쓴다. 오른쪽 뇌는 근육에 기억된 기술을 직감적으로 자연스럽게 펼친다. 그 순간의 몸짓은 정말 아름답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무의식 본능에서 이뤄진다.

펠레는 수많은 연습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본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의식 본능으로 공을 찼다. 본능이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발휘됐다.

한마디로 무의식 본능(무아지경, 완전몰입, 집중)은 의식이 더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우즈는 “퍼트 때 내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모를 것이다. 난 그 정도로 집중한다”고 말한다.

한국 스포츠 스타들 중엔 ‘몸의 근육’만으로 운동을 하는 선수가 많다. ‘반쪽 선수’인 셈이다. 10년 동안 몸 근육에 기술을 새겼다면, 그 후 10년은 정신근육을 키워야 한다. 생각을 끊고 ‘무의식 본능’을 길러야 한다. ‘의식 과잉’으로 엉뚱한 움직임이 나오면 안 된다. 생각이 많아 근육에 저장된 무의식 본능이 발휘되지 못하면 끝이다.

보통 머리 좋은 사람들은 왜 큰돈을 못 벌까? 그건 이런 경우, 저런 경우 등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평소 잘하던 것도 어느 날 갑자기 ‘난 왜 이렇게 못할까’라며 시무룩해진다. 열 사람 중 9명이 칭찬하고 한 명이 비난하는데도, 그 한 명의 비난에 잠을 못 이룬다. 어쩌다 맞은 홈런 한 방에 투구 폼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과 똑같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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