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65>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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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역성 동문 쪽이 소란한 틈을 타 임치로 가는 사자를 에워싼 제나라 기마 여남은 기(騎)가 북문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전해(田解)의 계책은 잘 풀리는 듯했다. 가로막는 적군이 없는 북쪽 길을 20여 리 달렸다가 동쪽으로 길을 바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날이 새도록 달려도 앞을 막는 한군은 없었다.

“됐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린 뒤에 임치로 달려가자.”

저만치 얼어붙은 제수(濟水)를 끼고 동쪽으로 달려가던 젊은 부장(部將)이 말고삐를 당기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강변의 야트막한 구릉 사이에서 말 울음소리가 길게 나더니 갑자기 한 떼의 기마가 땅속에서 솟아오른 듯 길을 막았다. 바로 관영의 기마대였다. 한신의 명을 받고 진작부터 거기 나와 지키고 있던 100여 기가 제나라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에 깨어 달려나와 길을 막았다.

“누구냐? 어디서 온 기마대냐?”

저희 편일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로 제나라 젊은 부장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때 마주 달려오던 기마대의 앞장을 선 장수가 기세 좋게 대꾸했다.

“우리는 관영 장군의 명을 받고 온 한나라의 낭중(郎中) 기병들이다. 여기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니 순순히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러면서도 두 손은 벌써 한 길이 넘는 장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제나라의 젊은 부장이 결코 겁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적이 쳐 둔 덫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에 여지없이 기세가 꺾였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철극(鐵戟)을 뽑아들었으나 그 움직임은 알아보게 허둥대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딜!”

사자로 나선 젊은 제나라 장수가 허둥대며 휘두르는 철극을 그런 외침으로 피한 한나라 장수가 나지막한 기합소리와 함께 자신의 장창을 내질렀다. 그걸 피하지 못한 제나라 장수가 무거운 신음과 함께 말 위에서 떨어지자, 호위하던 기병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모두 한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었다.

한나라 장수는 죽은 사자(使者)의 몸을 뒤져 찾아낸 편지와 사로잡은 기병들을 모두 관영에게로 보냈다. 관영이 다시 그것들을 한신에게 보내자 한신은 매우 기뻐했다.

“앞으로 사흘 뒤면 역성은 우리 손에 들어온다. 이제 남은 것은 임치로 가는 길이다.”

곁에 있던 괴철이 물었다.

“겨우 원병을 청하는 서신 한 장을 손에 넣고, 사자를 호위하던 기사(騎士) 몇을 잡았을 뿐인데,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한신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떨어지는 오동잎 한 잎으로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알 수 있듯이 작은 전기(轉機) 하나로도 큰 싸움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오. 전해는 이제껏 내 헤아림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내 헤아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외다.”

그리고는 전날과 다름없이 역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시늉만 되풀이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한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날도 전과 똑같이 하루를 보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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