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권혁범]강의석, 허성혜를 생각한다

  • 입력 2004년 12월 28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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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제자가 내게 “왜 선생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나요”라고 물어 왔다. 순간 당황했지만 다섯 가지 대답을 찾아냈다. 두 개만 공개한다면 첫째는 내가 사춘기 때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배경인 한 미국 대학 캠퍼스에 매료되었다는 것.

▼교실서 벌어지는 폭력, 서열화▼

둘째가 중요하다. 여기서 긴 얘기가 필요하다. 내가 군에 입대할 무렵 훈련소에는 특권층 자식들의 병역비리 사건이 터져 외국에서 ‘끌려온’ 이들이 많았다. 그중 한 친구는 모든 훈련병의 미움을 받았다. 초반에는 제식훈련을 하는데 그는 ‘뒤로돌아’ 같은 ‘어려운 동작’은 물론이고 팔을 교대로 흔들며 걸어가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연대 책임’이라는 군대문화 때문에 우리도 연일 군홧발에 죽도록 맞고 ‘원산폭격’을 밥 먹듯 해야 했으니 그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을까.

그에게 물었다. “아니 너는 어떻게 인간으로서 행진 하나 제대로 못하느냐?” 그가 “나는 태어나서 그런 것 배워 본 일 없어. 미국 학교에서는 체벌, 제식훈련, 조회도 없어”라고 답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셈이었다. 개구리는 반드시 미국에 가서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미국에 가서 12년이 넘는 유학 및 직장 생활 동안 사립 중고교에 가서 내 눈으로 여러 번 확인했다. 강당에서는 조회 대신 ‘미팅’이 있었고 학생들은 제멋대로 앉아, 심지어 다리를 꼬고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앉아 그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반장도, 학년 간 서열도, 줄서기도, 체벌도 없는 곳. 아, 인간집단이 제식훈련 없이도 이렇게 자유와 질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구나!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운영되고 교권이 존중되며 예산 결산은 공개되어 철저한 외부 감사를 받는 곳. 사유재산으로 돈벌이하는 게 아니라 ‘공교육’을 하는 사립학교. 돈오(頓悟)!

한국 상황? 여전히 학교에서는 일제 잔재인 ‘애국조회’, ‘사랑의 매’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서열화, 복장 및 머리에 가해지는 규격화된 신체적 억압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인권피해 및 비리가 매일 일어난다.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은 퇴학당하며 그를 돕는 교사는 해직되고 애정을 갖고 제자들을 창의적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도리어 요주의 인물이 된다. 사립대학도 상당수가 ‘동토의 왕국’이다. 비리를 폭로하는 교직원은 해직되고 ‘왕국’에서는 과학기술논문색인지수(SCI) 등이 인정하는 저널에 수십 편의 논문을 싣는 교수도 눈치 보며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훼손당하는 수모를 인내하는 ‘신민’에 불과하다. 내가 있는 학교에서는 다행히 그런 일이 없었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존엄성을 지키려는 교사와 교수는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학교의 명예’에 먹칠하고 순진한 학생들을 부추기는 ‘선동가’가 된다. 세종로와 여의도가 민주화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단식까지 하면서 근대의 초보적 권리에 불과한 종교의 자유권을 요구했던 강의석 군, 자신이 다녔던 고교의 인권 침해와 비리를 교육청 게시판에 실어서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우뚝 일어선 젊은 영혼 허성혜 양, 그리고 김동우 교수를 비롯한 수많은 ‘재임용 탈락’ 교수들. 교육열은 세계 최고이면서 왜 우리 교육은 붕괴되고 있는가. 왜 사람들은 사립학교법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자신들 자녀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무심할까.

▼우리교육 왜 붕괴되고 있나▼

청소년들은 바르게 행동하는 게 자기 신세 망치는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교육’ 받고 있는 셈이다. ‘불의를 보면 반드시 참자!’ 학교는 그들을 사회에 내보내기 위한 ‘준비교육’을 ‘충실히 잘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제도 개선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교육제도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 땅의 부모들과 교육자, 정치인들은 알고 있는지. 허 양과 강 군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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