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함인희/그들만의 ‘결혼 축의금’

  • 입력 2004년 4월 27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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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바람’에 묻히긴 했지만, 최근 한달 사이 결혼 축의금을 둘러싸고 우리네 심기를 불편케 하는 몇 가지 사건들이 보도됐다. 4월 초엔 전직 대통령 아들의 괴자금 수사 과정에서, 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수백억원대 재산은 결혼 당시 ‘16명으로부터 받은 결혼 축의금 30억원’을 종자 삼아 증식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바로 지난주엔 대기업주의 딸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축의금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2억1000만원에 대한 증여세 5400만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가 “결혼 축의금임을 입증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빛바랜 십시일반 풍습▼

가족이 세대에서 세대로 부(富)를 세습해가는 주요 통로임은 동서고금 다를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부만이 아니라 빈곤 또한 세습되기에 가족제도야말로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하는 온상이라 하여 맹렬히 비판하는 학자들이 다수 있다. 예전 신분사회에서 조혼 풍습이 발달했던 이유인즉 신분질서를 교란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서구에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이른바 ‘낭만적 결혼’ 이데올로기가 하류층을 중심으로 정착된 뒤 점차 중류층과 상류층으로 전파됐다는 가족사가들의 주장도 있다.

지금도 상류층으로 갈수록 암묵적인 ‘통혼권’이 작동해 중매혼이 연애혼을 압도하고 있음은 상식이고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혼의 의미, 친족관계, 자녀양육 방식, 가족가치, 나아가 가족의 일상 자체가 달라짐은 물론이다.

한데 가족이란 일정 부분 ‘신비화된 제도’인 만큼 가족과 관련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말해선 안 되는가’에 대한 합의가 더욱 공고히 이뤄지고 있다. 결혼과 가족에 돈이 개입된다는 것만 해도 우리네 정서를 감안할 때 솔직히 터놓고 말하긴 꺼려지는 면이 많은 것이 사실 아니던가. 덕분에 계층을 불문하고 가족 갈등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돈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저 쉬쉬하고 덮어온 것이 우리식 해결방안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직 대통령가와 재벌가에서 주장하듯 그 돈들이 결혼 축의금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돈의 액수가 상식적 수준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혼 축의금 관행은 아마도 곤궁했던 시절을 지나오면서 집안 대소사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십시일반(十匙一飯)하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던 듯하다. 지금도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선 축의금 예상액에 기대어 결혼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일 게다.

한 인류학자는 결혼 의례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문화권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낮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인도나 중동 지역에선 결혼식이 사나흘씩 지속되고 신랑 신부의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선 ‘시민 결혼(civil marriage)’이라 하여 결혼식은 생략한 채 부부가 가까운 관공서에 신고하는 절차만 밟는 경우가 다반사다.

▼검은 돈 정당화에 분노▼

그래서인지 우리네 결혼 의례가 화려해진다 싶어지면 은근히 걱정이 되곤 했는데, 우리 경우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이 더욱 화근이었던 것 같다. 그 결과 결혼식 자체가 화려한 이벤트 상품으로 포장되면서 과다 혼수에서부터 함값 및 신부 꽃값을 둘러싼 해프닝을 거쳐 축의금 송금 요구에 이르기까지 거북스러운 풍경을 연출해오지 않았던가.

가족 공리주의가 유독 발달한 우리네 정서를 인정한다 해도 하객이 건네는 축의금 규모가 수천만∼수억원대에 이른다는 건 진정 상식 밖이다. 가족 온정주의를 빌미로 거액의 불법자금 조성을 정당화하거나 탈세의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보통사람들 입장에선 상대적 박탈감의 수준을 넘어 무책임한 몰상식에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상식일 게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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