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非常]<2>고비 맞은 중소기업

  • 입력 2003년 5월 20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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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의 컴퓨터 자수업체인 하이텍인터내셔널의 경기 성남시 공장. 17일 오전 5대의 기계 가운데 3대가 멈춰서 있었다.

휠라코리아 등의 로고를 새기는 이 공장의 가동률은 올 들어 20%를 넘어선 적이 거의 없다. 직원도 반나절 근무와 무급휴가로 돌려 25명의 직원 가운데 10명만 출근했다. 해외 ‘큰손 고객’의 주문이 생산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로 급격히 옮겨갔기 때문. 10년 동안 자동화에 7억원을 투자해 직원을 45명에서 25명으로 줄이는 등 원가를 70% 낮췄지만 여전히 중국의 3배다.

한상원(韓相元·50) 사장은 “급히 만들어야 할 때만 한국에 주문한다”며 “사업을 그만둘 것인지, 공장을 해외로 옮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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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위기의 수출산업…문닫은 '대구섬유'

국내 중소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선 중국 등 저임 경쟁국에 뒤지고 기술집약적 산업에선 대기업과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기 때문. 여기다 경기침체는 내성(耐性)이 약한 중소기업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경기침체로 가중되는 어려움=제과회사의 협력업체인 A사(충남 논산시)는 작년까지 주·야간으로 돌리던 생산라인 8개 가운데 3개만을 가동한다. 야간 근무도 없앴고 공장 직원도 120명에서 60명으로 대폭 줄였다. 월간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마진도 크게 낮아졌다. 올 예상 순이익은 최근 수년 동안 꾸준히 낸 10억원대의 10% 선.

대형 유통업체들이 내세운 ‘가격파괴’와 ‘최저가격 정책’은 큰 타격이다. 김모 사장(54)은 “묶음으로 팔면서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도록 요구하고 각종 명목의 비용부담을 만들어 납품업체에 떠넘긴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황금어장’으로 통하던 중국 내수가 급랭한 것도 문제. 대표적인 품목인 휴대전화는 작년 6200만대에서 올해는 7200만∼8700만대가 수출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가격이 급락해도 재고가 쌓일 정도로 판매가 부진하다.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C사의 충북 공장엔 평소 재고 물량인 1만∼2만대를 크게 웃도는 10만여대가 창고에 쌓여 있다. 작년엔 500여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연일 야근과 연장근무를 했지만 지금은 인원 감축을 고려하는 형편이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국내 5대 휴대전화 생산업체를 제외하면 자금 융통이 잘 안될 만큼 어렵다”고 말했다.

▽가중되는 자금난, 인력난=경남 김해시 S기계 양모 사장(50)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경남지역의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해 직접 직원채용 공고를 낸다. 최소 30명은 있어야 공장을 유지할 수 있지만 현재는 22명에 불과하다. 양 사장은 “대학 출신 엔지니어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입사 1년 내에 중도 하차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서정대(徐正大) 부원장은 “중소제조업의 평균 인력 부족률은 9.41%로 총 20만명을 웃돈다”며 “중소기업들은 인력난을 최대의 어려움으로 꼽는다”고 말했다.

경기 의정부시에 있는 신동섬유의 김순희(金順熙·50) 사장은 요즘 밤잠을 설친다. 3개월 전 취업한 외국인 연수생 6명 가운데 4명이 회사를 떠나 해외 주문에 못 댈 처지에 놓였다. 하루 9시간을 일하면 먹고 자면서 85만원을 받지만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쉬 떠난다.

여기다 최근 들어서는 자금난까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가계대출 부실 등으로 금융기관의 경영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대출조건이 깐깐해진 탓.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269개 중소기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82.7%가 외상대금의 지불을 지연한 적이 있으며 △27.3%가 직원들의 봉급 지급을 지연한 적이 있는 등 자금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응답했다고 20일 밝혔다.

▽대안이 있을까=인재가 오지 않는 것도, 은행이 등을 돌리는 것도 기업의 장래를 어둡게 보기 때문이다. 원청기업이 불공정한 거래를 강요하는 것도 중소기업이 차별적인 경쟁우위를 가지지 못해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구 달성산업단지의 신일산업은 과감한 주력품목의 변경으로 성공한 사례. 김항규(金沆奎·55) 대표이사는 “외환위기 이후 폴리에스테르 직물 단가가 연간 20∼30%씩 떨어지자 주력품목을 폴리에스테르 니트로 바꿨다”며 “고급형 스팬 니트를 개발하는 등으로 올해도 수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역적 특장점인 연사 가공업체의 숙련된 기술을 활용한 것도 성공요인이다.

어려울 때마다 ‘도와 달라’며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세금으로 한계기업을 무작정 연명시키는 것은 대안이 되기 힘들다.

현대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1·4분기 대기업인 B사의 휴대전화 단가가 전 분기에 비해 4% 떨어지면서 기술력이 낮은 일부 부품업체들의 단가는 최고 50%까지 떨어졌다”며 “그러나 창조적인 디자인이 중요한 외장(外裝)업체들의 단가는 3% 떨어지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같은 휴대전화 부품 공급업체라도 독창성과 경쟁력에 따라 대기업과의 ‘협상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책임연구원은 “중소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저임노동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문제의 해결을 미루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렵더라도 중소기업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해 빨리 변화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건스탠리증권의 양호철(梁浩徹) 한국 대표는 “얼마나 과감히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변신하느냐에 중소기업의 생사(生死)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거듭남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남=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청주=장기우기자 straw825@donga.com

창원=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잉크테크 성공사례…값싼 '리필잉크' 착안 시장 선점▼

‘애프터마켓(after-market)’이란 부품을 갈아야 하는 기계에 부품을 공급하는 시장을 말한다. 대체 부품은 흔히 말하는 ‘정품’보다 값이 싼 게 보통이다.

리필(재활용)잉크와 대체 카트리지 전문 생산업체인 잉크테크는 한국에 프린터 소모품 애프터마켓을 개척한 뒤 시장을 확장하고 있는 경기 안산의 중소기업체다.

쉽게 말해 소비자가 프린터 잉크를 다 쓴 뒤 원래 있던 카트리지에 채워 쓸 수 있는 잉크나 값비싼 ‘정품’ 카트리지 대신 끼워 쓰는 카트리지를 주로 만들어 판다.

1992년 정광춘 사장(50)이 설립해 자본금 41억원에 종업원 220명, 2001 회계연도(2001년 6월∼2002년 5월) 매출이 291억원인 중견 기업으로 키워냈다.

‘비싼 외제 잉크와 카트리지를 좀 더 싸게 공급할 수 없을까’라는 아이디어로 시작한 사업은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급성장했다.

국산품을 써 달러를 아끼자는 국민적 관심이 리필잉크에까지 미치며 시장에 이름이 알려졌다. 1999년부터 외국에서도 유명해져 110개국 140개 업체로 수출이 열렸다.

“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 종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인터넷을 오가는 정보 유통량이 많아지면서 프린터 사용도 늘어날 것으로 봤습니다.”(정 사장)

이세훈 주임은 “이때부터 경쟁업체가 속속 생겨났지만 기술과 서비스의 질을 높여 현재 리필잉크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개발을 계속해 새로운 프린터가 나오면 신속하게 리필 부품을 내놓았다. 인터넷 통신판매를 하고 부품이나 프린터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거둬들여 애프터서비스를 했다.

현재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65%. 수출 대상 지역은 아시아 유럽 미주가 각각 3분의 1을 차지해 이상적이다.

외형 성장을 바탕으로 2002년 2월에는 코스닥시장에 등록했다. 19일 현재 주가는 6200원. 최근에는 두 남녀 연예인이 “바꿨어요? 잉크테크”를 외치는 광고로도 유명하다.

김동원 굿모닝신한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여러 곳에 잉크 충전방이 생기고 유럽연합이 재활용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사업 환경이 좋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회사는 5년 이상의 고도성장을 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는 유통망 개선과 신기술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여기에 남미의 경제 불황으로 수출량도 줄어 5월로 끝나는 2002 회계연도 실적은 지난 회계연도보다 크게 성장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회사는 예상했다. 2002 회계연도의 3·4분기까지(2002년 6월∼2003년 2월) 매출은 215억원으로 2001 회계연도 같은 기간보다 7.8% 늘었다. 순이익은 28억원으로 22.9% 늘었다.

정 사장은 “앞으로는 현수막을 인쇄하는 대형 프린터 애프터마켓과 최신 잉크분사 기술을 활용한 섬유인쇄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겠다”고 말했다.


안산=신석호기자 kyle@donga.com

▼특별 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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