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슈][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일류 패션병'도 국력이다

  • 입력 2002년 1월 23일 20시 41분


파리만은 아닐 것이다. 밀라노, 로마의 고급 패션 가게에는 한국 고객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요즈음 세일 기간이라 더욱 붐빌 것이다. 한국 고객의 줄이 100m나 늘어선 걸 보고 한 우국지사는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한데 한국인의 그 긴 줄을 보면서 미국 친구는 부럽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패션을 볼 줄 아는 센스가 부럽고 그 비싼 걸 살 수 있는 실력이 부럽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긴 줄을 보면서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패션 산업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메이커 안목 높여▼

내 미국 유학 시절엔 한국제라고는 싸구려 백화점에서 세 켤레에 1달러 하는 양말이 고작이었다. 통자루를 덥석 잘라 놓은 것이라 코도 없고 신고 다니다 보면 양말이 구두 속으로 흘러 내려와 신발을 벗어 또 끄집어 올려야 했다. 이거야말로 창피한 일이었다. 왜 우린 이렇게 밖에 만들 수 없을까. 수출할 게 이런 것밖에 없을까. 은근히 화도 났다.

하지만 요즈음엔 세계 시장에서 한국제 위상이 달라졌다. 싸구려 판에선 아예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젠 중고가(中高價) 쯤에서 찾아야 한다.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이게 모두 패션가에 몰려다니는 열성 팬들 덕분이다. 그만큼 안목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져야 장사꾼도 거기에 맞춰 상품을 만들어 내게 된다. 고객이 없으면 만들 생각부터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은 브랜드를 좋아한다” “너무 유행에 민감하다” “비싸야 잘 팔린다.” 허영, 사치, 거기에다 위화감까지 들먹이면서 우리의 유별난 패션 열풍을 꼬집는다. 마치 망국의 징조인양 규탄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냉정해야 한다. 고급 문화란 원래 약간은 사치스럽고 허영기도 있는 법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사치꾼 덕분에 소비자도, 메이커도 안목이 높아진다. 그래야 우리도 고급을 만들어 고급 시장에서 한 판 겨뤄 볼 게 아닌가. 부가가치도 높다. 언제까지나 싸구려나 만들어 싸구려 시장에서 장사할 생각인가.

이들 고급 소비자가 있어야 무역 역조 개선에도 한 몫을 한다.

잊지 마라. 우리는 지금 세계 시장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무역 물동량만으로도 세계 10위권이다. 내 걸 팔아먹으려면 남의 것도 사야 한다. 이게 시장 원리다. 지금도 외제차를 굴리면 세무조사 등 마치 매국노 취급을 하는 게 우리 정서다.

명심하라. 이젠 우리도 세계 유수의 자동차 수출국이다. 그러면서 남의 차는 안 사고? 이래서야 누가 우리와 장사를 하려 들까.

지난 번 경제 위기 때 어느 주유소는 외제차에는 기름을 안 판다는 간판을 내붙였다. 어느 우국지사는 외제차에다 발길질도 했다. 국영방송에서도 외제 배격 운동을 한참이나 해댔다. 외화 한 푼이 아쉬운 판에, 이렇게 하고야 누가 여기 와서 장사를 하려 들 건가.

심각한 경제 위기나 불황을 우리의 외제 선호 의식 탓으로 몽땅 돌리려는 국민 정서는 지금도 강하다. 그래서 들어오는 문을 닫고 살겠다는 건가.

우리의 폐쇄적이고 근시안적인, 그리고 터무니없는 국수주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세계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장사를 해 먹을 생각인가.

좀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자. 우리끼리 모여 앉아 골목 끝에 구멍가게나 할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 건 팔고 남의 것은 안 사고? 하고 싶어도 안 된다. 국제 감시 기구가 많아서 제도적으로도 못하게 되어 있다.

▼세계무대서 당당히 겨뤄야▼

판만큼 사야 한다. 고급 외제를 찾는 사람 욕할 일이 아니다. 패션이든, 자동차든 고급을 들여와야 수준이 높아져 언젠가 우리도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건 한 두 사람의 디자이너 힘만으론 안 된다. 수준 높은 소비 중산층이 두터워야 고급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법이다. 이건 상식이다. 자기 돈 써가며 그 먼 데까지 가서 세계 일류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뽐내는 한국의 멋쟁이들이다. 부럽고 멋있다.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국제 무대에서 언제나 변두리에서 눈치나 보며 서성대기만 하지 않았던가. 이제 당당한 주역으로서 화려하게 등장했으니 이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닌가.

바야흐로 우리의 무대는 세계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 괜히 딴 소리 말자. 배가 아프고, 눈 꼴 사나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참자. 축하한다, 고맙다는 인사까진 안 해도 좋다. 그러나 눈만은 세계를 향해 크게 떠야 한다.

이시형(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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