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차병직/이해못할 '법의 잣대'

  • 입력 2001년 7월 17일 19시 06분


차 병 직(이화여대 대우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법이 있다. 세워드가 미국 상원에서 노예법을 지지한 웨스터에게 항의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나는 그것을 한 두 세기 전에나 가능한 일 정도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가 우리를 괴롭힌다. 도처에 널려 있는 법들 중 국가안보나 질서유지라는 가면을 쓰고 교묘히 권리를 제한하는 악법, 그 법을 예측불가능한 잣대와 함께 집행하는 검찰, 그 요구에 따라 시대 상황의 눈치를 보되 오히려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결론을 내놓는 법원을 보면, 그런 느낌이 저절로 든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헌법 제정 5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헌법 정신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중되고 상당 부분이 실현됐더라면 사정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다. 하지만 헌법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헌법을 만든 국민에게 죄가 없듯이, 오직 헌법을 곧잘 망각하는 국가권력, 헌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려는 세력들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되레 헌법 정신의 파괴자들이 무조건 준법을 강요하는가 하면, 개혁의 발걸음에 권리가 짓밟혔다고 아우성이다.

헌법은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헌법과 법률을 둘러싼 어지러운 의견 차이와 분쟁의 해결을 위해 고안된 제도가 재판절차다. 그리하여 우리도 각급 법원을 설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헌법재판소까지 두었다. 하지만 사법부는 판결과 결정으로 의견 차이를 좁히고 분쟁을 해결하는데 거듭 실패하고 있다. 사법부는 팽배한 불신과 불만을 국민의 과도한 권리의식과 몰이해의 탓으로 돌린다. 재판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사법권 독립성 침해로 몰아붙인다.

그렇지만 오묘한 법리가 어떠하고 재판기록에 숨겨진 구체적 사정이 얼마나 절절한들, 평범한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판결이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비록 일반적 표현으로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한 장탄식이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최근의 판결 몇 개만 보더라도 이런 현상은 증명된다.

낙선운동을 벌였다가 지난주 서울지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총선연대 집행부 간부들은 오늘 서울고법에 항소한다. 이제 그들은 실정법에 집착한 재판 결과에 불복해 다시 헌법적 정당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은 시민운동가 몇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기는 정치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간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운동이 전개되자 전국의 수백개 단체가 참여했고, 수많은 국민이 몸과 마음으로 함께 했으며, 그 지지도는 투표 결과에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총선연대 운동은 국민적 운동이었으며, 그에 대한 재판은 국민에 대한 평결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정당행위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일축했다.

어차피 불복종운동은 처벌을 감수하는 자세를 전제로 하므로, 실정법 위반 부분은 참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 권리를 제한하는 선거법의 헌법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 도대체 왜 위헌법률심사제청 신청을 기각하면서까지 헌법적 판단의 길을 막아야 하는가. 물론 판사에게도 1차적 위헌심사권은 있는 셈이지만,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감각이 안타깝기만 하다.

성격과 내용은 다르지만, 연이어 보도된 두 의원에 대한 선고 결과도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검찰과 법원의 장영신 전 민주당 의원 선거법 위반 사건 처리 태도에 대해 고발했던 시민단체들은 경악했다. 그러면 대법원의 선거 무효선언은 그 속죄편인가. 자민련 원철희 의원에 대한 일부 파기에 대해 자민련은 사법정의 운운하며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조만간 나머지 부분이 확정돼 원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될 때도 그 소신은 유지될까.

총선연대 선고 법정에서 재판장은 시민단체 지도자들의 너무도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며 훈시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까. 국민의 성원을 받으며 옳은 일을 행한 사람들이 유죄가 되고, 수억원의 검은 돈을 챙긴 정치인들은 무죄가 되는 현실에서 올바른 선거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들은 5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고, 고비용 저효율의 선거풍토로 선거관리의 공정성을 해친 국회의원들은 80만원의 벌금만 내면 되는 계산법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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