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차병직/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 입력 2001년 5월 15일 18시 20분


5월이 오면 어김없이 그들이 모이는 까닭은 독일 들판을 수놓는 유채꽃 때문이 아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이나 이미 굳어버린 향수 따위를 서로 달래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이유를 확인하자면 21년 전의 사건을 되살려야 한다.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동서로 두 동강이 났지만, 운 좋게 서독은 미국의 서유럽 정책에 힘입어 경제성장의 아우토반을 달리게 되었다. ‘라인강의 기적’ 행렬에 근로자는 부족하였고, 그 일부를 채우는 구실로 우리 간호사와 광원이 파견되기 시작한 것이 60년대 후반이다.

▼독일에서 열리는 오월제▼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첫째였으나, 그 뒤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 여권이란 것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시절, 스무 시간 이상 시달린 끝에 다다를 수 있었던 유럽의 분단국. 낯선 땅에서 말을 배우고 새로운 습관을 익혔다. 남편이 무너진 막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내고 있을 때, 아내는 서울을 다녀가며 국적기에서 기내서비스로 던져준 라면박스에 어린 생명을 뉘고 재워야 했다. 그런 서러움은 오히려 추억거리라도 될 수 있다.

1967년의 동베를린 사건 이후 누구나 언제든지 간첩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보태졌다. 멀리 대사관이란 것은 있었지만, 늘상 가까운 곳에서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붙어 다녔다. 이국에서의 불안정한 삶에서 바라본 조국은 보호자가 아니라 감시자였을 뿐이다.

분노는 세월과 함께 조금씩 자랐다. 그러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불행한 사태를 조금씩 알려 가는 사이에 쌓였던 분노는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비록 조국으로부터 받은 것은 없으나 줄 수는 있다고 느낀 순간 모임은 시작됐다. 5월이 되면 지역과 단체별로 기념식을 가졌다. 군사정부의 독재자가 유럽을 방문하면, 그들은 휴가를 얻어 독일 전역에서 자동차를 달려 모인 뒤 시위를 했다.

1987년부터는 해마다 5월 18일에 가장 가까운 주말을 택해 5월제란 이름으로 2박3일의 대동제를 열기 시작했다. 횟수가 거듭되면서, 단순한 추모행사에서 벗어나 유럽 동포의 연대활동의 장으로 확대됐다. 그 해의 현안이라고 생각되는 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2세들은 틈틈이 익힌 풍물놀이로 뒤풀이마당을 거든다.

이번 주말에도 빌레펠트 근교에서 열네 번째 5월제를 연다. 5월 18일 바로 그 날 시작하여, 모임이 끝나는 일요일엔 가칭 ‘한민족유럽연대’ 창립대회를 갖기로 되어 있다. 21년 전 시작된 고통과 고뇌의 움직임을 구체적 삶과 연결되는 희망과 믿음의 바탕으로 전환시키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민족유럽연대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실천할 것을 목표로 한다. 남북한을 바로 알고 알리며, 악법 개폐 운동을 통해 기여할 수 있으리란 신념을 표시한다.

조국의 참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면서 국내 인권운동과 노동운동, 성차별 극복과 환경운동까지 지원할 것을 내용으로 한다.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표어에는 유럽의 해외통일운동에 대한 오해를 벗겨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유럽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서 스스로의 권익을 보전하여 2세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제시하며, 이 모든 과제에 공감하는 동포의 재결속을 약속한다.

▼'한민족유럽연대'로 힘모아▼

이런 선언을 유럽 동포들이 21세기의 5·18을 맞아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취지문의 내용이 새삼 새로울 것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 혹은 더 나아가 해외반정부 인사들의 연례행사 정도로 치부하는 태도는 질곡의 정치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편견일 뿐이다.

밉거나 곱거나 정치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힘이 되는 법인데, 그 힘을 긍정적 방향으로 다스려 인간다운 삶의 밑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의 정신적 끈을 끊어 놓을 방법이란 없다. 떠나 있는 사람에게 조국은 또 하나의 세계임이 분명한데, 민주주의와 정의가 정착되지 못하면 그들에게 조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민족유럽연대의 정신을 지지하는 것은, 내세울 것 없는 정치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현재의 자괴감 때문만은 아니다.

차병직(이화여대 대우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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