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산드라 불록

입력 2001-03-30 17:40수정 2009-09-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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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킬>의 조엘 슈마허 감독은 산드라 불록에 대해 "그녀를 안다는 것은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그녀 옆에 있기만 해도 모르는 사이 하루가 밝아진다"는 이상한 미신을 철석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산드라 불록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은 그녀를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진다고 믿어 '하루를 밝게 만들어주는 사람' 상까지 그녀에게 수여했다. 그녀는 학교 치어리더였고 선머슴 같은 천방지축이었으며 적어도 내숭 따윈 떨지 않는 호탕한 계집애였다.

언제나 쾌활했던 그녀는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배우 초창기 시절에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주위 사람들에게도 불안함을 달래줄 일종의 마취제처럼 여겨졌다. 산드라 불록이 친구들에게 오랫동안 '행운의 마스코트'로 간직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길게 늘어진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갖지 못한 여자가 주눅들지 않고 할리우드를 어슬렁거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바텐더로 일하며 배우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에도 여전히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길고 신중한 기다림 끝에 그녀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엄청난 사건을 만났다. <스피드>를 준비중이던 장 드봉 감독이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키아누 리브스의 상대 역으로 덜컥 산드라 불록을 점찍은 것이다. 장 드봉 감독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장 드봉의 선택은 옳았다. 풍성한 갈색머리에 촌티를 막 가셔낸 듯한 각진 얼굴을 지닌 산드라 불록은 사랑하기에 참 알맞은 여자였다. 강인한 듯 보이지만 쉽게 부서져버리고 쉽게 부서질 듯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는 이 미묘한 '강약의 조화'는 어느 모로 보나 특별했다.

그녀는 줄리아 로버츠가 가진 '2천만 달러 짜리 미소'나 카메론 디아즈의 '완벽한 팔등신 몸매' 대신 솔직하고 털털한 자신의 '진짜' 이미지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는 그 솔직함으로 순식간에 할리우드를 감염시켰다.

모든 건 타고난 끼 덕분이었다. 1965년 미국 워싱턴주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독일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헬가와 미국 성악 코치였던 아버지 존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무대와 늘 가깝게 지냈다. 오페라 시즌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나머지 시즌에는 버지니아주 알링톤에서 집시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 8세 때 '집시 꼬마' 역으로 엄마와 함께 처음 무대에 섰던 그녀는 그때 이미 배우가 되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당시 엄마는 그녀가 줄리어드 음대에 들어가 오페라 공부를 하게 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드라마스쿨에 입학한 그녀는 체홉의 <세 여인>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극 무대에 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절대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메소드 연기를 배우기 위해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엔 물론 그녀도 살아남기 위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모든 걸 해치워버리는" TV 시리즈를 찍어야 했다. NBC TV 시트콤 <워킹 걸> <바이오닉 소머즈>같은 시리즈물에 출연했던 그녀는 이곳에서 별달리 명성을 얻지 못했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7년 <행맨>으로 데뷔한 후 <데몰리션맨>의 여경찰 역을 맡기까지 무려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행운은 <데몰리션맨>부터 시작됐다. 원래 <그들만의 리그>의 로리 페티가 실베스타 스탤론과 이 영화의 공동 주연으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로리 페티가 갑가지 이 역을 고사하는 바람에 산드라 불록이 어부지리로 그 역을 따냈다.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경찰 레니나 역을 맡았던 산드라 불록은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고 연이어 출연한 <스피드>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사랑에 눈 먼 여성 캐릭터엔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터프걸 이미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를 깨트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는 '대타'로 출연한 영화로 기회를 잡았다. 데미 무어의 대타로 출연한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루시. "이 남자일까, 저 남자일까" 갈등하는 루시의 서툰 애정을 귀엽게 살려낸 산드라 불록은 이때부터 영화 속에서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적절히 조절해나가기 시작했다.

<러브 앤 워> <투 이프 바이 씨> <사랑이 다시 올 때> <포스 오브 네이처>같은 달콤한 멜로 영화와 <네트> <스피드 2> 등의 액션 영화를 골고루 섭렵한 산드라 불록. 그녀가 제작자로 참여한 신작 <미스 에이전트>는 산드라의 이 두 가지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철저히 "그녀만을 위한 영화"다.

<미스 에이전트>에서 그녀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뭔가 부족한 여자'에서 '모든 걸 다 갖춘 여자'로 변신하며, <미녀 삼총사>의 카메론 디아즈처럼 모든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완벽한 카리스마의 전형으로 돌변한다.

생각해보면 <미스 에이전트>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그녀의 실제 모습과도 아주 흡사했다. 그녀는 실제로 <미스 에이전트>의 그레이시 요원처럼 넘치는 열정과 카리스마, 고상한 취미, 섹시한 매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플라맹고 댄스와 피아노 치기, 쇼핑, KFC 닭고기와 아이스크림, 초콜릿, 존 스타인백의 책, 톰 존스의 음악, 삼바, 재즈, 클래식, 오드리 헵번의 모든 영화와 <오즈의 마법사>, 등산, 집에서 뒹굴기, 인터넷 서핑 등을 좋아하는 그녀는 적어도 1년 365일 내내 심심하게 살진 않을 것같다. 자기 안의 무한한 에너지가 바닥나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차오르고 있으므로.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에 출연했을 때 'Heaven Knocking On My Door'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던 그녀는 또 어떤 재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현재 제작자로 변신해 두 번째 영화 <건 샤이>를 만들고 있는 그녀는 2001년에도 여전히 '정열의 핏빛'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을 듯하다. 다만 그녀에게 현재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할 수 있는 남자뿐'이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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