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미워할 수 없는 악당, 베니치오 델 토로

입력 2001-03-16 18:03수정 2009-09-2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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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그는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한 미국 평론가의 짓궂은 표현대로 "제임스 딘과 리카르도 몬탈반의 합성품" 같은 눈을 가진 베니치오 델 토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감춰진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유령처럼 스크린을 떠돌다 사라질 비극적인 조연으로 오랫동안 여겨겨 왔다.

상처 입은 눈, 시무룩한 눈썹, 넓게 퍼진 입과 잘 패인 주름살을 가진 그는 타인을 한 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무서운 얼굴을 지녔다. 진흙바닥을 뒹굴었을 것 같은 그의 과거가 생각보다 훨씬 상류층의 '그것'이었다고 말하면 너무 놀라운 일일까.

그는 잘 나가는 변호사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그의 가족들은 베니치오가 배우를, 그것도 무시무시한 갱스터 전문 배우를 하게 되리라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문득 그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웃었다. 그들에겐 "배우가 되고 싶다"는 베니치오의 말이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것이 베니치오의 진심임을 알게 됐을 때 가족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셨다. 가족들은 그가 엄마, 아빠의 대를 이어 유능한 변호사가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 1년간 가족과의 절연까지 감수했던 그는 그러나 배우 초창기 시절, 잘 풀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잘 생긴 배우들이 넘쳐나는 할리우드는 베니치오를 홀대했고 방송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각했다. "9살 때 겪었던 엄마의 죽음,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청소년기, 배우를 꿈꿀 당시 가족들이 던졌던 비웃음"에 대해. 생각해보면 안락했던 유년기와는 달리 고향 푸에르토리코를 떠나 온 후 그의 삶엔 견딜 만한 시련들이 적당히 포진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L.A. 배우써클극장에서 정식 연기 교습을 받고 있을 무렵 그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NBC 미니 시리즈 <카마레나 이야기>에 출연할 기회를 얻은 것. 그러나 쇼비즈니스 세계의 길은 멀고 험했다. "이제 드디어 모든 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무명 시절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존 글렌 감독의 <007 살인면허>에서 밀매업자 산체스의 부하 다리오를 연기했던 그는 그 후 범죄 용의자 아니면 악당 전문 조연에 머물렀다.

존 베일리 감독의 <차이나 문>에선 동료를 등쳐먹는 악당 딕키를 연기했고, <유주얼 서스펙트>에선 유력 용의자 중 한 명인 프레드 펜스터를, 아벨 페라라 감독의 <퓨너럴>에선 템피오가(家)의 라이벌 조직 보스이자 템피오가 막내 아들 살해 용의자인 가스파를 연기했다. 역할은 달랐지만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이미지라는 점에서 모두 다를 게 없는 캐릭터였다.

그렇다고 베니치오가 항상 악역만 맡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게리 올드먼 같은 카리스마의 악당은 절대 되지 못했다. 험상궂게 생긴 외모 탓에 악당으로 오해받긴 했지만 결국은 위험인물이 아닌 '보통 시민'으로 반전되는 캐릭터. 부잣집 딸 에밀리의 자작 유괴극에 연루된 <트렁크 속의 연인들>의 빈센트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나쁘게 생겼지만 속 마음은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다.

<바스키아>에선 길 거리 예술가 바스키아의 친구 베니를, <더 팬>에선 불운의 야구선수 주안 프리모를 연기하며 악당의 이미지를 가셔냈던 베니치오 델 토로.

이렇듯 히트 영화에 자주 얼굴을 내비쳤던 그였지만 몇몇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그는 대역전극의 주인공처럼 할리우드의 중심에 서있다. <트래픽>에서의 호연으로 할리우드배우조합이 수여하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당당히 노미네이트되어 있기 때문.

35년을 사는 동안 가장 행복한 시절을 누리고 있는 베니치오 델 토로는 정말 오랜 시간을 우회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 <트래픽>의 멕시코 경찰, <스내치>의 다이아몬드 도둑 프랭키, <웨이 오브 더 건>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삼류인생 롱바우로 전세계 극장가에 침범한 그는, 이제 드디어 가족들 앞에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됐다. "나도 이제 드디어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노라"고.

가족들 앞에서 수줍게 이런 말을 내뱉을 그를 상상하면 사나운 그의 눈매가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악당'

"난 잭 니콜슨도, 말론 브랜도도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는 영화사에 또 어떤 위대한 배우로 남게 될까. 그건 아무래도 시간이 말해줄 것 같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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