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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체험은 감동의 울타리

입력 2000-11-02 19:07업데이트 2009-09-2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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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미국 인류학자의 아프리카 티브족 현지 조사연구 경험담 한토막. 그는 위대한 작품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티브족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이야기해주다 아주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했다.

햄릿의 어머니가 남편이 죽은지 한달 뒤 햄릿의 작은아버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티브족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아주 잘했는 걸”이었다. “서양사람들도 우리와 별 차이가 없군. 여기서도 그렇게 한다오.”

체험의 수준을 뛰어넘어 ‘햄릿’의 보편적 정서에 대해 설명하려던 이 학자의 노력은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결국 티브족 사람들에게 ‘햄릿’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은 “아주 좋은 이야기”라며 만족해 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얼마전 왕자웨이(王家衛)감독의 ‘화양연화’ 기사를 쓰고난 뒤 한 대학생에게서 받은 e메일 때문이다. 왕자웨이의 열성 팬이라는 이 대학생은 ‘화양연화’를 봤는데 쓸쓸한 정서는 이해하겠지만 왜 60년대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인지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물어왔다.

나는 그의 반응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60년대 홍콩이라는 특정한 공간이 배경이지만, ‘화양연화’는 ‘공간’이 아니라 ‘나이’에 대한 영화다. 60년대 홍콩에 대한 왕자웨이의 노스탤지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영화에 공감한다면 이제 과거의 자신, 기억의 갈피마다 숨겨진 이루지 못한 마음을 되돌이켜보는 추억과 더불어 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는 뜻이리라.

혹시 우리가 보고 감동한 모든 영화는 티브족의 ‘햄릿’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는 이의 체험을 넘어서지 못한다. 누군가는 ‘화양연화’를 보며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마음이 저미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이 영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식의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E.T.’를 볼 때 영화가 만들어진 70년대의 시대적 정황을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시대적 배경,감독의 의도, 권위있는 해석같은 건 몰라도 좋다.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을 들춰볼 수 있도록 말을 걸어오는 영화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걸작인들 스쳐 지나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는 쓰레기일 뿐이다.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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