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소비자의 「회초리」

  • 입력 1997년 5월 20일 20시 36분


작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가 무려 2백억달러를 넘어섰다. 경제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사회 전반적으로 외제품 선호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이 국가 경제가 어려울 때 국민이 국산품을 애용해준다면 불황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가 후진국 수준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국산품애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비록 품질이 나쁘더라도 국산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장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국내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을 철저히 규제했으므로 밀수를 통하지 않고는 외제상품을 구입할 방법도 없었다. ▼ 맹목적 국산권장 잘못 ▼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사람이 혼자서 살 수 없듯이 국가나 기업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없는 것은 사 오고 있는 것은 내다 팔고, 기술을 서로 가르쳐주고 배워 가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할 길이 없다.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소비자들이 개인의 기호에 따라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제행위이며, 값싸고 품질좋은 상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다.「우리 국민은 당연히 국산품을 사주어야 한다」는 식의 안이한 사고는 또 다른 정신적 패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청소년들의 외제문화 외국상품에 대한 탐닉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대학가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봐도 외제물건 하나쯤 지니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다. 왜 우리 젊은 학생들이 우리 제품을 외면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애국심에 호소하여 국산품을 애용하자고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 따끔한 충고가 애국심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산품에 대한 과보호가 아니라 소비자들의 엄정한 평가와 까다로운 품질개선 요구, 그리고 이에 대응하려는 기업들의 진지한 노력이다. 까다로운 일류 소비자가 있어야 일류 품질과 제품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일류제품은 불량률이 적다. 가령 전자업의 경우 불량률이 3%라면 그 회사는 망한다. 그래서 나는 삼성 임직원들에게 「불량은 적이다, 불량은 악의 근원이다」라고 되뇌면서 일하라고 강조한다. 혼다가 미국에서 생산된 차를 일본으로 역수출할 때의 일이다. 미국의 품질기준에 합격했던 차가 일본에서는 소비자들의 클레임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문 안쪽에 묻은 먼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국산품을 구입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기업이 품질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한 시장개방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내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소비자들은 국산품에 대해 사랑의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건설적인 비판과 충고를 아껴서는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글로벌경쟁시대의 진정한 애국심인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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