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컬처플러스]'복수는 나의것' 돈에 목숨 건 사회 무서워

  • 입력 2002년 4월 7일 17시 25분


문제는 돈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이념이든 예술이든 도덕이든 사랑이든, 인간이 어찌 돈의 노예가 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근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돈의 위력을 보아왔지요.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두 딸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고리오 영감에게 돈이 없어서였습니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그녀가 음독자살한 것은 실연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눈덩이처럼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서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로 단숨에 들어갑니다.

주물기술자 류(신하균)와 전기기술자 동진(송강호)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몸에 익힌 기술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착하고 부지런하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류는 신부전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누나가 있고, 동진 역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두 사람이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마주 앉았다면 따뜻한 위로주를 건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둘은 원수가 되었고, 각자 서로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딸과 여자친구)를 빼앗아버립니다.

류는 돈이 필요했고 동진은 그 돈을 가졌습니다. 류의 심성이 아이처럼 맑다든가 동진이 착한 사장이라든가 하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 돈이 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니까요. 류는 동진의 돈을 빼앗으려 했고, 거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이려고 갔다가 그녀의 여동생까지 뜻하지 않게 살해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원하는 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없듯이 계획대로 돈을 쉽게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동진의 딸이 사고로 죽은 뒤부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회개의 길을 걷지만 류와 동진은 복수의 사다리를 오릅니다. 법 없이도 살아왔던 사람들이 법을 무시하고 나선 것이죠. 류와 동진의 방식은 처음부터 대화나 토론이 불가능하며 몸과 몸이 부딪혀 피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복수의 과정이 잔혹하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분명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게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를 뿌리고 살을 찢고 신장을 질겅질겅 씹어대더라도 그것이 결코 돈의 잔혹함에는 미치지 못하겠지요. 동진은 딸이 죽은 강으로 류를 끌고가서, 난 네가 착한 놈이란 걸 안다고 말합니다. 누가 이 수채화 그리기를 즐기고 누나와 오손도손 살고 싶어한 착한 노동자를 유괴범이자 살인자로 만들었습니까.

장기밀매업자들이 류를 속여 돈을 빼앗듯이 류도 동진을 속여 돈을 빼앗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피해자였던 류가 가해자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돈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이가 돈 때문에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악순환. 이것이 돈에 목숨을 거는 사회의 적나라한 풍경입니다. ‘죄와 벌’을 읽으면서 그저 관념적으로만 상상했던 순간들이 섬뜩하게 옆구리를 파고들지요.

어떻게 하면 이 피비린내 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요. 영미(배두나)가 제시하는 선동적이고 명쾌한 답은 오히려 웃음을 자아낼 뿐입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낭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지요. 그녀 혼자 장기밀매업자들을 만나는 장면이나 동진에게 전기고문을 받은 후 내뱉는 대사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떨어뜨립니다.

류와 영미의 살인범인 동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멀리 가버렸으니 죽일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 죽음을 어떤 빛깔로 만들까요. 박찬욱 감독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영미의 동지들을 등장시킨 것은 복선을 깔았음에도 여전히 어색하지만, 죽어가는 동진의 신음과 웅얼거림으로 최후를 장식한 것은 훌륭한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가 돈의 피해자이고 그 누구도 자본의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끝까지 지킨 것이니까요. 산뜻한 이별 대신 끈질기게 관객을 물고 늘어지는 쪽을 택한 겁니다.

대부분의 관객은 편치 않은 표정으로 극장문을 나서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빗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밤하늘을 우러르는데, 갑자기 동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당신이 그런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서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돈 때문에 죽을 줄 몰랐어. 나처럼 착한 사람이 왜 칼에 찔려 혼자 죽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왜? 무얼 잘못 했는데?’

<소설가·건양대 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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