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47…잃어버린 계절(3)

  • 입력 2003년 10월 21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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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달려도 해바라기 밭은 끝이 없었다. 키가 훌쩍 큰 해바라기들이 마치 정렬한 병사들처럼 똑바로 서 있었다.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해바라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는 해바라기도 있었다. 헉 헉 헉 헉, 왜 보는데? 낙원 앞에서 총 들고 서 있는 병사처럼! 내 몸을 구석구석 핥듯이 보았던 병사처럼! 보지 마! 보지 말란 말이야!

넘어져 고개를 들자, 해바라기가 손을 뒤로 묶인 채 사살 당한 지나 사람으로 보였다. 어이, 다들 나와 봐, 이 짱꼴라 염탐꾼 좀 나와 보라고. 나미코와 몇 살 차이나지 않을 변발의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죽음의 공포에 등이 널빤지처럼 굳어 있었다. 아라카와 중대장이 군도를 뽑았다. 소년은 묶인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퍽! 하고 피가 솟구쳤다. 등은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중대장이 군도를 손에 든 채 등을 걷어차자, 소년이 어젯밤 내린 비가 고여 있는 웅덩이로 쓰러지면서 목이 나미코의 발치로 굴렀다.

그 옆에 줄기가 잘려 시든 해바라기는, 불길 속에서 야윈 손발을 버둥거렸던 후미코 언니, 나는 비명을 질렀다. 살아 있어! 언니! 물! 빨리 물! 고하나 언니가 내 머리를 가슴에 안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죽었어…죽었어도 불에 태우면 저렇게 움직여…보지마…누가 쓰다듬는 듯한 기분에 머리에 손을 대자, 머리카락이 뜨거웠다. 대륙의 8월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도 화상을 입고 떨어질 정도라니까, 하 하 하 하, 가토 중사가 웃는 소리가 들리고, 송이가 커다란 해바라기를 올려다보자,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사람의 얼굴로 보였다.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모두 뒤섞여…붕∼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미코는 고개를 더 쳐들었다. B29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으니까, 더 이상 폭격은 없을 텐데, 그래도 무섭다. 나미코는 해바라기 밭에 몸을 숨겼다. 설 수 있는 자는 한 달,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자는 삼 주, 누워만 지내는 자는 일 주, 누운 채로 오줌 싸는 자는 사흘, 말도 못하는 자는 이틀, 눈도 깜박이지 않는 자는 내일…누구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누구지? 나를 안았던 남자 중 누구인 것 같은데…아아 몰라…모르겠어! 나미코는 두 귀를 막고 달렸다, 그러나 달려도 달려도 해바라기 밭은 끝이 없었다, 끝없는 삶처럼, 끝없는 죽음처럼,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 삶에서 도망칠 수 있는가, 나미코는 알 수 없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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