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4)

  • 입력 2000년 1월 17일 14시 59분


열정이 도대체 무슨 독감 따위인지 이제는 기억 조차 없지만 바람 부는 날 어느 언덕 위에서 오리나무 같은 데 기대어 서면 좋잖아요. 작별할 때 한 맺힌 핏물도 내게 덮어 씌우지 않고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는 그림자 같이요. 아버지의 감 이야기에 나오는 색시처럼 내색 않고 같은 선에 서서 넉넉한 시선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아 주는 아낙이 되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헤어지진 말고 오래 같이 살 수 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송영태는 이 선생이 돌아간 오후에 왔어요. 동물원 역 앞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선 그쪽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나는 다른 도시에서 누가 올적마다 마중 나가기가 편리해서 역 구내의 레스토랑을 약속 장소로 정하곤 했거든요.

역사 바깥에서부터 오르는 철제 계단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는 대합실 쪽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멀리서도 그의 뒷통수를 보고 나는 금방 그를 알아 보았죠.

송 형….

하고 나는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습니다. 어쩐지 영태야, 라고 부르지 못하겠더라구요. 그와 가졌던 친밀감의 방에서 나는 한발짝쯤 문지방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아니었는지. 그가 머리를 천천히 돌려 나를 올려다 보았어요.

어, 그쪽에서 오네.

나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확인하듯 잠깐 바라보고 있었어요. 영태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요. 여기서 사 입었는지 긴 갈색 가죽 코트를 입었고 안경도 옛날의 크고 넓적한 뿔테 안경이 아니라 동그랗고 작은 금속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하긴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한국에 있는 동료들 사이의 부담스러운 소속감으로부터 놓여났을테니까요. 그는 탁자 위에 베를린 시가 지도와 카메라를 얹어 놓았고 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타구 오는 길이야?

아니, 아우토반으로 왔어. 여기가 제일 찾기 쉬운 것 같아서.

그럼 자동차 가지구 왔어?

응, 돌아다니기 불편해서 중고차를 샀지.

입학은 된 거니?

뭐 그냥 아직은 언어 연수 중이라….

점심은 어떻게 했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충 때웠어. 야, 우리 나가자.

아이 한 숨이나 돌리구.

그의 차는 초오 역 앞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는데 카키 색의 번듯한 승용차였지요.

뭐야, 이거 베엠베 아냐. 오늘 호강하겠네.

겉만 번지르르 해. 벌써 두 번이나 카센터에 들락거렸어.

송영태와 나는 앞 자리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가 시동을 걸면서 말했어요.

그래두 아우토반에선 붕붕 날아. 밟는 대루 나가드만. 한 형 여기 길 잘 알지?

땅 속으로만 다녀서 큰 길만 조금 알아.

여기서 제일 가까운… 그렇지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가 보자.

초오 역 앞에서 쿠담과 부다페스터 가로에 이르기 까지 모든 길과 광장에는 동베를린에서 몰려나온 사람들과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며 서베를린 사람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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