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7)

  • 입력 1999년 12월 27일 14시 58분


처음 그와 같이 잤을 때에는 선잠 자고 어렴풋이 깨어났다가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까무룩 하고 일어나 보면 한 두 시간이 종적없이 사라져 버리듯이 열에 뜬 채로 흘러갔어요. 그의 팔굽 안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어깨넘어로 새벽빛이 창문에 스며드는 걸 볼 때에 내가 그를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지요.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서 달려오고 달려가고 그러다가 어긋나고 그가 거기에 있는가를 방의 불빛으로만 확인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가을까지 우리는 뭘했을까. 계절이 바뀌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와 나는 두 사람의 범위를 넘어서 서슴없이 그의 부근으로 스며들었어요. 나는 얼마 안 가서 그의 친구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구요. 연구소 사람들이며 그의 학교 후배들, 교포들, 식당 아줌마와 식품점 아저씨, 그리고 레스토랑의 웨이터들과 그의 집 동네 사람들까지.

시월이었을 거예요. 지금 돌이켜보면 장벽이 해체되는 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기 몇주 전의 일이었지요.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전화 녹음이 여러 개 되어 있었어요. 나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커피포트에 물을 채우고 여과지를 끼우고 커피를 넣고 버튼을 누르고 하면서 무심코 듣고 있었는데 문득, 귀가 뚫리는 것 같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한 형 나야, 송영태야. 이번 여름에 나 독일에 왔어. 괴팅겐에 있는데 진작 연락해 볼려구 그랬는데 거처가 안정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늦었지. 여기서 몇 년 공부 좀 해볼려구. 잘있다는 얘기 정희씨 한테서 들었어. 또 연락할게.

나는 다시 전화기 앞으로 가서 그의 목소리를 확인했습니다. 한 형 나야, 하는 첫마디에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그리고 그제서야 지난 두어 달 동안이라도 잊었던 당신 생각이 나고 미경이가 사라진 공장 앞 당구장 건물이 생각나고 서울이 생각났어요. 그건 오랜 여행 뒤에 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 놓인 손때 묻은 물건들을 보며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존재하는 것과 자신의 그동안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감의 상실은 사실은 착각이겠지요. 아니면 그게 죽음과 닮아서인지도 몰라요. 모두들 거기에 그대로 있고 우리만 쏙 빼놓았던 거예요.

전화가 왔던 그 저녁에 이희수씨와 나는 쿠담에 나갔어요. 신영호씨 아내가 생일이라고 우리쪽에서 저녁을 사게 되어 있었거든요. 우리는 가끔 가던 한국 식당에 갔어요. 여행 씨즌도 지났고 주중이라 식당 안은 한산했어요. 두 테이블 정도에만 손님들이 앉아 있었지요. 우리는 광장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이 선생이 신씨 아내에게 물었어요.

계수씨 뭘 드시겠어요?

비싼 거 시켜두 돼요?

그럼요, 우린 가진게 마르크 밖에 없다구.

좋아요. 이것 저것 먹구 싶던 걸 차례로 시킬 거야. 갈비, 낙지볶음, 파전, 그리고 소주 수출품 말고.

그네의 남편이 말렸지요.

왜 그래, 누구 거덜을 낼려구?

나는 오히려 그의 아내 편을 들어줬어요.

괜찮아요. 이 선생 가진게 돈 밖에 없다는대두. 본국에서 월급 받고 여기서두 받으니까.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