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70)

  • 입력 1999년 11월 12일 19시 46분


공연히 그러지들 말아요. 둘이 짜구선.

나는 정말 화가 난 것처럼 흘겨 보았다.

그대신 오늘 하는 거 봐서 용서를 해주든지 파탄을 내든지 할거야.

이거 큰 일 났는데.

그날 정희네를 따라가서 술 밥 잘 먹고 혼자 돌아오는데 다시 은결이 생각이 났다. 뭐 내 잘못이지. 에미가 되어 가지구 생일 한번 제대루 챙겨준 적이 있나 선물을 사다 줘 봤나. 옆에서 팔 베개 하고 같이 자 본지도 언제인지 생각이 잘 안날 정도였으니. 그러나 자책일뿐 돌아서면 그런 안타까움 때문에 더욱 은결이 보기가 겁이 났다. 나는 언제나 나 혼자였다.

정희 결혼식 전전날에야 세탁소에 맡겼던 투피스 찾아서 입지는 않고 개어 들고 그냥 물감 튄 청바지에 스웨터에다 점퍼 차림으로 집으로 갔다. 집안은 떠들썩 했다. 외숙모에 고모에 사촌들에 아이들까지 법석이었다. 나는 은결이를 찾아 보았지만 고것은 정신없이 이 방 저 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었다. 친척들과 건성으로 웃는 얼굴을 보이며 인사하고 나는 은결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앉아서 담배나 피웠다. 침대 머리 옷걸이에 새 옷이 걸려 있었다. 나는 옷걸이째로 들고 앞 뒤로 돌리면서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흰 원피스였는데 목과 소매와 치마자락에 레이스가 달리고 앞에는 섬세하게 흰 장미를 수놓은 예쁜 아기 예복이었다. 아마 은결이가 입으면 발목에까지 치렁치렁 닿으리라. 그리고 아기 손에 맞도록 깜찍하게 만든 조화 부케도 있었다.

이건 얘가 시집 가는 모양이잖아. 하다가 그만 나는 두 가지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학교 선배가 그냥 애 낳고 살다가 못내 서운하다고 포한이나 풀겠다며 뒤늦게 올린 결혼식에 갔던 적이 있었다. 딸이 둘이었는데 세 살 다섯 살 터울이었던 것 같다. 신부 화장을 해놓은 삼십 대의 선배는 그런대로 아름다웠다. 그때만해도 파격적이었던 그들 부부가 당당하게 손을 잡고 나란히 입장하는 앞에서 두 딸이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다 큰 처녀 은결이가 시집을 가는 장면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저 갈뫼에서 교감 선생 부인의 도움으로 그애를 낳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아무런 예상도 못했고 간절히 원하거나 지울 수도 없이 은결이의 출생은 뜻밖의 것이기도 했다. 뜻밖의 일이 인생 도처에 있을 터인데. 프리다 칼로의 중절 수술로 찢겨진 상흔 투성이의 몸이 생각났다. 그네의 모성을 누가 앗아가 버렸는지. 그건 리베라도 아니고 또 다른 남자도 아닐 거야. 그건 바로 우리 세기의 문명이 그랬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아니야. 모성 같은 걸 가질 겨를이 없었다.

정희의 결혼식은 내게 몇 장의 기념사진으로 남았다. 나는 그 사진 중에서 가족사진을 액자에 넣지도 않고 그냥 낱장으로 화실 책장 위에 압핀으로 꽂아 두었다. 정희는 고개를 갸웃이 저희 서방에게로 기댈 듯이 하고 있다. 아마도 사진사가 주의를 주었겠지. 사진관에서 수정을 그렇게 해서 그런지 두 주인공들을 빼고는 다른 이들은 모두 멍청하고 못나 보인다. 두 사람 앞에 야무지게 꽃 바구니를 들고 섰는 은결이만 신랑 신부에 버금가게 빛나 보인다. 그리고 저 뒤쪽 한 구석에 시골 은행의 창구 직원 같은 복장을 한 내가 고개를 기웃이 하고 넘겨다 보고 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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