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9)

  • 입력 1999년 11월 11일 19시 51분


학교에 나가구 화실에 가구 저녁에는 세 식구가 모여서 저녁을 먹어야겠지.

나는 진심으로 그런 정경을 생각해 보았다.

그럴 듯 하구나. 어머니하구 의논해 보구나서.

정희가 말했다.

난 은결이하구 언니 보다두 더 오래 같이 살았어. 그동안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몰라.

고놈에 기집애.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고 내뱉었던 모양이다. 정희가 좀 당황스런 얼굴이 되었다.

언니 샘 나서 그래?

아니야…고집이 꼭 즈이 아빠 닮았어. 뭐랄까, 어쩐지 섭섭해서.

지난 주에 집에 들렀을 때 작은 소동이 일어났던 게 생각났다. 저녁답이었는데 현관으로 들어서니 아줌마는 집으로 돌아가고 어머니 혼자 거실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보고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입술 위에 얹고는 쉬이 했다. 내가 입 모양으로 왜요 하고 보니 텔레비젼의 볼륨도 속삭이듯 낮춰져 있었다. 은결이 잔다. 벌써요? 나하구 전화 했는데. 정희하구 시내 나갔다가 왔어. 내가 모처럼 온다고 했는데도 잊어버렸는지 은결이는 태연하게 잠들어 있고. 얼굴이나 보아 두려고 방에 들어갔더니 이불을 차 내던지고 옆으로 꼬부리고 잠들어 있었다. 볼에 뽀뽀를 해주고 일어서 나오려다가 뭔가 발에 툭 걸렸다. 딸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드라운 융지로 만든 헝겊 공이었다. 은결이 백일 때에 정희가 사왔던 아가 옷에 들었던 물건이다. 아마 일제였나. 안에 방울이 들어 있는지 흔들면 소리가 난다. 은결이는 갖난아이적부터 한 손에 공을 쥐고 만지작거리면서 우유를 먹었다. 우유를 먹거나 잠을 청할 때면 꼭 공을 찾았다. 이제 다섯 살이 되는데도 가지고 놀아서 공은 거의 넝마가 되었고 이곳 저곳 꿰진 틈으로 솜이 비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 흉해라, 새로 사다 줘야겠다. 생각하고 나는 무심코 공을 집어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에서 자고 아침에 뭔가 소란스러워서 깼는데 은결이의 높다란 울음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나는 파자마 차림으로 나갔다. 은결아 엄마 왔다아. 그랬더니 고것은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싫어 엄마 가, 내 친구 데려와.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난리였다. 곁에서 달래던 엄마가 중얼거렸다. 어제 재울 때 분명히 봤는데 도대체 어디루 간 거야. 뭘 찾으세요? 아유 나두 모르겠다. 그놈에 공을 맨날 끼구 살지 않니. 나는 얼른 현관 앞 쓰레기통에 가서 공을 찾아왔다. 어머니가 그랬다. 나두 한번 버렸다가 혼이 났어. 고것에 정을 붙인 모양이지. 은결이는 공을 한쪽 뺨에 대고 부비면서 내게 쏘아댔다. 엄마 미워. 나는 저절로 눈물이 글썽해지고 말았다.

여기에요.

정희가 손을 흔들었고 키가 크고 사람 좋게 생긴 박형이 성큼성큼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내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별 일 없으시죠?

별 일이 있죠.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받았고 어리둥절한 그에게 정희가 말해 주었다.

언니에게 방금 얘기했어요.

뭐…말야?

우리 날짜 받은 거.

그는 짐짓 놀라는 시늉을 했다.

뭐야, 아니 그럼 여태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거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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