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38)

  • 입력 1999년 10월 6일 18시 43분


개인전을 하게 된다면 관람객이 거의 없는 아침 개장 시간에라도 살짝 가서 한형 솜씨의 흔적을 바라보게 될텐데요. 오 선배가 나오시게 되면 나는 더 떳떳해 질지도 몰라요. 이런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바람 불고 벼락 치고 캄캄하던 끔찍한 밤도 동이 트면 기적처럼 밝아오듯이 혁명의 순간은 올 것입니다.

혁명, 그 다음엔 뭘 할거지? 무인지경의 산맥이나 들판이 있고 달구지와 나귀가 겨우 지나다니는 거친 길이 있는 두메 산골이 있거나 소총이나 아니면 겨우 기관총 정도가 살상무기이던 시절의 서부영화 같은 장면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야. 자동소총을 메고 탄띠를 두른 니카라과의 여전사 사진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정규군의 막강한 군사 퍼레이드가 광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부두에 하역되고 있는 산더미 같은 무기들. 하늘을 가르고 편대 비행을 하는 초음속 돌파 전투기들. 레이더와 함정과 항공모함의 불야성. 유리와 강철의 탑처럼 하늘로 치솟은 도심지의 빌딩들. 산업시찰을 돌고 있는 깨끗한 작업복 차림의 높은 사람들 일행이 기계의 옆으로 느릿느릿 움직여 가고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질주하다 위협사격에 쓰러지는 그런 순진무구한 장면 말고 행정부 청사를 접수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의 의결기구를 무장으로 지키는 장면 따위는 이젠 없다. 아마 점점 그런 가능성은 사라져 가리라. 끊임없는 토론과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설득과 뜨뜻미지근한 합의와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약간의 진전이 오거나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될 것이야. 그래 기껏 조합이 아니면 선거를 하게 되겠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실타래의 시초를 찾을 수도 없이 방금 놓쳐버린 실 끝이라도 잡게 되면 다행일 거야. 이 실 끝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모두 어슷비슷해질 걸. 다시는 출발점을 향하여 돌이킬 수도 없이. 제도를 부숴 버리는 동안에 그것을 부수는 제도가 만들어지겠지. 누구나 언제든 투쟁하는 전사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혁명위원회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아이를 낳거나 식량 배급이 늦는다고 투덜대고 좀 일찍 들어올 수 없냐고 바가지를 긁고 생활비가 거덜이 났다고 하소연하고. 식구들은 모두들 끊임없이 먹어대고 마셔대고 싸우다가 성교도 하고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새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고 다시 토론해야 한다. 그가 출발했던 땅에서 이제는 아득한 미래로 날아간 하늘 사이에는 무한 천공이 입을 벌리고 있다. 혁명이라고. 그건 정지된 섬광이야. 오현우처럼 유폐되거나 그의 아우들 같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연발사격에 쓰러지지 않는 한 그는 출퇴근하는 토론자로 기진맥진 살아가게 될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나는 피익, 웃고나서 송영태의 편지를 잘게 찢기 시작했다. 찢어서 손아귀에 쥐니까 꼭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느이들 틈에 끼기는 커녕 근처에라두 가나 봐라. 나는 정희보다 더 단순하고 조용하게 내 일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작정을 했다. 학교에서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물을 흘려도 그때뿐. 교정의 나무들처럼 잎사귀나 몇 점 떨어뜨리고 조용히 아무 느낌 없이 서 있을 거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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