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77·끝>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6월 29일 02시 59분


북핵을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됐던 1994년,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한미현인회 모임에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는 한국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라고 강조한다. 1996년 경북 경주시에 모인 한미현인회 회원들.
북핵을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됐던 1994년,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한미현인회 모임에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는 한국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라고 강조한다. 1996년 경북 경주시에 모인 한미현인회 회원들.
<77>에필로그-우리의 가치

1994년과 똑같은 한반도 위기상황
“국민통합” 내세우면서도 싸우기만…
구심점 없는 국민통합은 가능할까?

지금 북한의 핵실험을 둘러싸고 남북 간의 긴장상태가 재연되고 있다. 1994년에도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있었다. 19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한 임시 사찰을 실시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북한은 두 곳의 핵 시설을 신고하지 않았다. IAEA가 두 시설의 특별 사찰을 수락하라고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1993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은 NPT 탈퇴를 철회하고 NPT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1994년 6월에 IAEA를 공식 탈퇴하고 영변에 있는 원자로를 재가동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비밀리에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는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정밀공습을 통해 방사능을 누출시키지 않고, 핵시설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미군이 북한을 폭격하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여 전쟁이 재발할 것이 명백하므로 북폭을 절대 반대한다고 미 측에 통고했다.

이 시기에 민간단체로 한미현인회(Korea-US Wisemen’s Council)가 있었는데 이 급박한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현인회 멤버들(김경원 전 주미대사, 김만제 전 부총리, 구평회 한미경제협의회장,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최종현 SK그룹 회장, 김병국 고려대 교수)은 6월 10일 워싱턴으로 갔다. 미국 측에서는 유명한 국제정치학자이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안보특별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 대북 협상대표로 활약하던 로버트 갈루치 씨, 그리고 국무부 고위 관리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 대표들은 미국의 북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유발할 위험이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토론을 듣고만 있던 브레진스키 박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국의 방침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은 북한의 핵화를 반대하는 동시에 북한의 핵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방침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어 그는 “한국은 미국의 보호하에서 무사하기만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침이 나를 찔렀다. 나는 그의 발언을 받아 “그런 것이 아니라 양국의 목적은 하나이지만 목적 달성을 위한 전략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 후 다행히 6월 15일,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동결 약속을 받아내면서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브레진스키 박사가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라고 한 말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일반 국민은 고사하고 군인들은 유사시에 생명을 바치고 싸워야 하는 사람들인데 과연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은 가족과 나라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를 위해 누구와 싸우느냐가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2000년 12월 18일 중앙일보에 ‘주적(主敵)’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썼다. 북한의 정치세력과 북한 동포를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서 주적이라고 하면 우리 군인들도 헷갈리고 북한 동포들도 섭섭해 할 것이니, 주적의 정의를 ‘북한’이라고 하지 말고 ‘자유 민주체제와 우리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내용이었다.

6·25전쟁 당시 20만 장병은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버렸는데 그들의 가치관은 분명했다. ‘반공통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는 ‘반공’의 명분만으로 군인들의 가치관을 통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 명확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의 국가이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국가이념인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국민이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 1994년과 똑같은 위기상황을 놓고 여야와 좌우가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국민적 통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국가이념이라는 정신적 구심점 없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 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면서 나의 이야기를 마감하기로 한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 ‘나의 삶 나의 길’ 남덕우 前국무총리편은 오늘이 최종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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