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40>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5월 16일 02시 54분


1979년 11월 3일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이날 영결식에는 서울 광화문 인근에만 200여만 명이 모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9년 11월 3일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이날 영결식에는 서울 광화문 인근에만 200여만 명이 모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40>한 시대의 막이 내리다

“한국 민주화는 필연… 지켜봐달라”

美연설 기립박수 받고 오른 귀국길

‘朴대통령 서거’ 청천벽력 뉴스가…

경주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작별한 다음 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워싱턴에 들러 구면의 정부 요인들을 찾아본 다음 뉴욕에 도착해 플라자 호텔에 투숙했다. 그 다음 날 한미경제협의회 주최로 오찬 강연을 하게 됐는데 이 지역의 많은 실업인, 금융인, 국제금융기관, 그리고 교포들이 전 좌석을 메운 것을 보고 작금에 보도된 한국 사태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준비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워낙 여러 번 읽고 고치고 한 원고인지라 전문을 거의 외울 수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원고를 보지 않고 즉흥 연설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 관한 나의 평소의 잠재의식이 그대로 터져 나와 나도 모르게 원고에 없는 말도 하게 됐다.

연설의 요점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정치도 경제와 마찬가지로 단계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민주주의가 후진국 토양에 뿌리를 내리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후진국의 특징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의 악순환이다. 빈곤하기 때문에 정치가 불안정하고, 정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정부가 무엇을 일관적으로 해보려야 해볼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후진국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맹자의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 양보와 타협, 다수결에 대한 복종, 자유와 책임에 바탕을 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지금 정치적 민주화의 경제적 기반을 만드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눈부신 경제발전 덕택으로 민주화의 욕구가 커져가고 있고 정부도 그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자생적 민주화를 기대할 수 없지만 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민주화 요인을 만들어내 필연적으로 민주사회로 이행하게 마련이고 한국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화는 시간문제이니 이해와 인내를 갖고 지켜보기 바란다.

연설을 끝내자 청중이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뜻밖의 일이었다. 아마도 나의 솔직한 심경 토로가 그들의 공감을 샀던 모양이다.

다음의 목적지인 휴스턴으로 갔다. 휴스턴에서는 순전히 경제협력에 관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회의장으로 들어서자 TV 기자가 영상 세팅을 해놓고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에 응하자 첫 질문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데모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출국 당시에도 부산사태가 걱정이 됐는데 출국 후에 사태가 악화된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는 출국 후에 일어난 일이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데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화의 모습이 아니냐고 얼버무렸다. 이 인터뷰가 신경에 걸려 나의 그날 연설은 졸작이 되고 말았다.

미국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아들이 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그곳에 들렀다. 오찬을 들고 있을 때, 아들이 헐레벌떡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가지고 왔다. 무슨 영문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주일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서울의 신문을 모아 도쿄(東京) 하네다 공항으로 나오라고 부탁했다. 비행기 안에서 기사를 읽고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청와대 빈소로 달려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던졌던 지도자가 결단의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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