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사랑, 거리를 존중하는 것

  • 입력 2009년 4월 18일 02시 58분


벌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우듬지 안쪽, 서로 마주 보는 가지 끝에 달팽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달팽이들은 이른 아침 동이 튼 뒤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서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가까워지고 싶다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마주 보는 두 나뭇가지 사이의 거리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 날마다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어느 날, 두 마리 달팽이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마주 보기만 할 게 아니라 서로 만나 직접 속내를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합일하는 지점을 향해 두 마리 달팽이는 길을 떠났습니다. 달팽이들에게 그 노정은 두 번 다시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까지 담보된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열망으로 두 마리 달팽이는 쉬지 않고 길을 갔습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을 상상하며 모든 걸 이겨냈습니다. 그리하여 나뭇가지가 합일하는 지점에 당도했을 때 두 마리 달팽이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서로에게 돌진해 상상하던 것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온몸을 부딪쳐 서로의 각질을 깨고 내부에 들어 있던 점액질 속살의 감촉을 원 없이 확인한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의 짜릿한 감동과 절정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뒤에야 두 마리 달팽이는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각질이 파괴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은 확인했지만 그 대가로 더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두 마리 달팽이는 우듬지로 날아드는 새들의 먹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으로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건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허무는 일입니다. 얼마나 가까워졌느냐, 그것이 곧 사랑의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로 합일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사랑의 환상은 찰나처럼 완성되지만 그것은 또한 찰나처럼 해체됩니다.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생겨난 겸양지덕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걸 문자 그대로 풀어 몸도 하나요, 마음도 하나가 되는 게 부부라고 강변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윽박지르고 하나로 만들기 위해 상대방을 길들이려 하는 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서로 다른 면모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기본자세입니다. 나를 제외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점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우주 만물이 하나의 뿌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다름을 사랑하는 일이 진정 하나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 그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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